깔뱅은 신 중심적인 세계관을 갖고 있다.
그래서 인간 이해도 신 이해와 불가분의 관계를 가진다.
신을 이해해야 인간을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다.
신과의 관계 속에 인간이 있기 때문이다.
자연이나 사회의 모든 것도 신이 창조한 피조물이기 때문에
역시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인간이 정의 될 수 있는 것이다.
인간이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 속에서 살아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초월'과 '접근'이라는 두 극
을 가진다. 다시 말하여, 우리가 하나님을 알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이 우리에게 자신을 계시하신
다. 그러나 하나님을 알았다고 하는 순간 하나님
은 이해를 초월하면서 '아니오'를 말한다. 하나님
은 우리와 함께 계시지만(Deus nobiscum), 거기
에 제한되지 않으며, 본질은 숨고(Deus
maiestatis) 다만 영광의 표시(marque)나 신호
(signe)로만 계시되는 것이다.
인간은 죄인이기 때문에 하나님께 다가갈 수
없다. 다만 하나님이 다가올 때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하여, 하나님은 지고한 하나님이
시기 때문에, 그의 계시가 있어야만 그분을 알 수
있다. 다행히도 하나님은 죄인인 우리에게 예수를
통해 자신을 완전히 계시하셨다. 그래서 깔뱅은
겸비와 복종을 강조한다.
그러나 죄인들은 하나님의 접근을 즐기는 대신
에, 내재하시는 하나님(Deus nobiscum)과 초월
하시는 하나님(Deus maiestatis) 사이에서 견디
지 못하였고, 자기들 스스로 하나님을 상상하고
꾸며댔다. 깔뱅은 이것을 미신이라고 말했다. 미
신은 우상숭배와 결합되어 있고, 우상숭배는 미신
을 구체화하였다. 죄인들은 하나님의 계시를 떠나
자기들 마음대로 상상하는 미신 속에 살았다. 하
나님과 그의 계시를 분별 못하고, 우상숭배로 떨
어졌던 것이다.
Deus nobiscum이자 Deus maiestatis인 하나
님 사이에서 우상 숭배에 빠지지 않기 위해, 우리
는 어떤 자세를 취해야할 것인가? 깔뱅은 '신앙과
희망', '사실과 경험'이라는 이중의 관점으로 이를
설명하였다. 신앙과 희망은 아직 있지 않은 것을
보게 한다. 이 관점에 의해서, 하나님의 부재나
초월 속에서 미래의 임재를 기다리게 된다. 반면
에 신의 계시에 눈뜬 사람들은 현실 속에서 하나
님을 알고, 경험하고, 확인한다. 이러한 사실과 경
험의 관점으로부터, 사람들은 하나님이 자신의 약
속에 신실하다는 것을 발견한다. 신자들은 자신들
이 완성에 이르기까지 늘 이 관점들을 가지고 산
다.
깔뱅은 사람들에게 그들의 구겨진 모습을 바
로 보고, 인정하고, 받아들이라고 수없이 권한다.
그는 가상적인 현실 속에서 자신이 주인이고 명
령자인 왜곡된 현실을 버릴 것을 촉구하며, 타자
와의 바른 관계 속에서 살라고 충고한다. 올바른
하나님과의 관계에 들어갈 때 참된 기쁨과 진정
한 사랑, 그리고 자신에 대한 충만한 신뢰를 경
험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처럼 깔뱅의 인간이해
는 낙관적이다. 그러나 전혀 위험이 없는 것은
아니다. Deus nobiscum(내재적인 하나님)에 대
하여만 집착하고, Deus maiestatis(초월적인 하
나님)에 대하여 무관심하게 되는 위험이다. 사람
들은 점점 더 선하게 되어 가는 자기 자신의 삶
에 만족하면서, 율법주의나 문자주의, 도덕주의
등 복잡한 현실에 대한 이해가 없는 단순성으로
달려갈 수 있다.
깔뱅은 내재적인 하나님을 통해서 초월적인
하나님을 이해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그러나, 양
극성이 주는 긴장을 거절하고, 그 중 하나로만
달려간다면, 인간 주체와 존엄성을 말살하는 비
관주의에 빠지거나, 아니면, 삶의 깊이가 없는,
즉 복합적 현실에 대한 이해가 없는 천박한 낙관
주의로 귀착된다.
그래서 인간 이해도 신 이해와 불가분의 관계를 가진다.
신을 이해해야 인간을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다.
신과의 관계 속에 인간이 있기 때문이다.
자연이나 사회의 모든 것도 신이 창조한 피조물이기 때문에
역시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인간이 정의 될 수 있는 것이다.
인간이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 속에서 살아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초월'과 '접근'이라는 두 극
을 가진다. 다시 말하여, 우리가 하나님을 알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이 우리에게 자신을 계시하신
다. 그러나 하나님을 알았다고 하는 순간 하나님
은 이해를 초월하면서 '아니오'를 말한다. 하나님
은 우리와 함께 계시지만(Deus nobiscum), 거기
에 제한되지 않으며, 본질은 숨고(Deus
maiestatis) 다만 영광의 표시(marque)나 신호
(signe)로만 계시되는 것이다.
인간은 죄인이기 때문에 하나님께 다가갈 수
없다. 다만 하나님이 다가올 때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하여, 하나님은 지고한 하나님이
시기 때문에, 그의 계시가 있어야만 그분을 알 수
있다. 다행히도 하나님은 죄인인 우리에게 예수를
통해 자신을 완전히 계시하셨다. 그래서 깔뱅은
겸비와 복종을 강조한다.
그러나 죄인들은 하나님의 접근을 즐기는 대신
에, 내재하시는 하나님(Deus nobiscum)과 초월
하시는 하나님(Deus maiestatis) 사이에서 견디
지 못하였고, 자기들 스스로 하나님을 상상하고
꾸며댔다. 깔뱅은 이것을 미신이라고 말했다. 미
신은 우상숭배와 결합되어 있고, 우상숭배는 미신
을 구체화하였다. 죄인들은 하나님의 계시를 떠나
자기들 마음대로 상상하는 미신 속에 살았다. 하
나님과 그의 계시를 분별 못하고, 우상숭배로 떨
어졌던 것이다.
Deus nobiscum이자 Deus maiestatis인 하나
님 사이에서 우상 숭배에 빠지지 않기 위해, 우리
는 어떤 자세를 취해야할 것인가? 깔뱅은 '신앙과
희망', '사실과 경험'이라는 이중의 관점으로 이를
설명하였다. 신앙과 희망은 아직 있지 않은 것을
보게 한다. 이 관점에 의해서, 하나님의 부재나
초월 속에서 미래의 임재를 기다리게 된다. 반면
에 신의 계시에 눈뜬 사람들은 현실 속에서 하나
님을 알고, 경험하고, 확인한다. 이러한 사실과 경
험의 관점으로부터, 사람들은 하나님이 자신의 약
속에 신실하다는 것을 발견한다. 신자들은 자신들
이 완성에 이르기까지 늘 이 관점들을 가지고 산
다.
깔뱅은 사람들에게 그들의 구겨진 모습을 바
로 보고, 인정하고, 받아들이라고 수없이 권한다.
그는 가상적인 현실 속에서 자신이 주인이고 명
령자인 왜곡된 현실을 버릴 것을 촉구하며, 타자
와의 바른 관계 속에서 살라고 충고한다. 올바른
하나님과의 관계에 들어갈 때 참된 기쁨과 진정
한 사랑, 그리고 자신에 대한 충만한 신뢰를 경
험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처럼 깔뱅의 인간이해
는 낙관적이다. 그러나 전혀 위험이 없는 것은
아니다. Deus nobiscum(내재적인 하나님)에 대
하여만 집착하고, Deus maiestatis(초월적인 하
나님)에 대하여 무관심하게 되는 위험이다. 사람
들은 점점 더 선하게 되어 가는 자기 자신의 삶
에 만족하면서, 율법주의나 문자주의, 도덕주의
등 복잡한 현실에 대한 이해가 없는 단순성으로
달려갈 수 있다.
깔뱅은 내재적인 하나님을 통해서 초월적인
하나님을 이해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그러나, 양
극성이 주는 긴장을 거절하고, 그 중 하나로만
달려간다면, 인간 주체와 존엄성을 말살하는 비
관주의에 빠지거나, 아니면, 삶의 깊이가 없는,
즉 복합적 현실에 대한 이해가 없는 천박한 낙관
주의로 귀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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