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댄동산 처럼
분명한 목적을 갖자 <우산 속 두딸>
물댄동산처럼
2002. 4. 14. 07:51
본문말씀 요한복음 5장 2-9절
2 예루살렘에 있는 양문 곁에 히브리 말로 베데스다라 하는 못이 있는데 거기 행각
다섯이 있고
3 그 안에 많은 병자, 소경, 절뚝발이, 혈기마른 자들이 누워 (물의 동함을 기다리니
4 이는 천사가 가끔 못에 내려와 물을 동하게 하는데 동한 후에 먼저 들어가는 자는
어떤 병에 걸렸든지 낫게 됨이러라)
5 거기 삼십팔 년 된 병자가 있더라
6 예수께서 그 누운 것을 보시고 병이 벌써 오랜 줄 아시고 이르시되 네가 낫고자
하느냐
7 병자가 대답하되 주여 물이 동할 때에 나를 못에 넣어 줄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
8 예수께서 가라사대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시니
9 그 사람이 곧 나아서 자리를 들고 걸어가니라 이날은 안식일이니
1.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 - 선택의 중요성
베데스다 연못에 38년이나 병을 앓던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의 목표는 병을
치료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병을 치료하기 위해 그는 연못이 동할 때 들어가고자
하였습니다. 천사가 가끔씩 내려와 물을 움직이는데, 이 때 연못에 제일 먼저
들어가는 사람은 무슨 병에 걸렸든지 다 나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치료의 방법은 많이 있습니다. 그가 선택한 것은 많은 방법중에 하나였습니다.
우리에게는 많은 정보가 있지만 그중 일부만을 선택하게 됩니다. 정보는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 정보를 바르게 선별하고 선택하는 것은 더욱 중요합니다.
손자는 2500년 전에 손자병법 13편 13번 용간(用間)편에 "승리의 핵심은
정보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정보를 얻는데 돈을 쓰지 않으면 멍청함의
극치라고 충고합니다. 그리고 정보를 잘 이용하는 사람은 ① 똑똑한 사람 ②
의리있는 사람 ③ 분석력이 있는 사람이라고 하였습니다. 정보를 잘 이용하는
사람이 승리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 38년된 병자는 많은 방법 중에 가장 미련한 방법을 택하였습니다.
38년동안 그 연못에 매여 성과가 없었으면 방법을 바꿨어야 하는데, 그는 한가지
방법밖에 모르는, 융통성이 없는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아마도 복권을 사는 사람과 같은 입장이었을 것입니다. 복권은 돈이 적게 들지만
운이 좋으면 일확천금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당첨될 확률은 거의 없습니다. 이
38년된 병자도 돈이 안드는 방법, 가장 손쉽게 치료되는 방법이라고 생각하여
베데스다 연못을 선택하였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의 방법은 잘못되었습니다. 운에 의지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지,
그는 몇번이고 체험하였을 것입니다. 연못이 동할 때 다른 사람이 먼저 들어가
버리는 것이었습니다. 아무도 그를 도와주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자신의 힘으로
들어가 보려고 했지만 환자의 몸으로 다른 사람보다 먼저 들어가는 것이 쉽지
않았습니다.
자! 여러분들 같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이정도 되면 다른 방법을 찾아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38년동안 그 병자는 융통성을 발휘하지 못하였습니다.
변화를 받아들이지 못하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에게는 돕는 사람이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38년동안 그곳에 있었으면 선배도 아마 대선배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아무도 그를 돕지 않았습니다. 그는 대인관계에서도 실패한 사람이었나
봅니다.
지금은 급변하는 정보화 시대입니다. 어제의 신제품이 내일의 고물이 되는
세상입니다. 바른 선택과 실천이 있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겸손하여
대인관계에서도 실패하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2. 방법보다 목적이 중요하다.
사람들은 목적을 세워놓고 그 목적을 이유기 위해 구체적인 방법을 세웁니다.
그런데 나중에는 그 방법에 얽매이다 자신의 목적을 잃어버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상갓집에 가서 그 유가족들을 위로한다고 통곡하여 울었습니다.
하도 애통해 하며 크게 우니 도리어 주위 사람들이 달래었습니다. 그 울던 사람이
하는 말
"그런데 누가 죽었죠?"
38년된 병자에게 예수님이 찾아가셨습니다. 한가지 밖에 모르는, 융통성이라고는
눈꼽만큼도 없는 그 사람에게 예수님께서 물었습니다.
"네가 낫고자 하느냐?"
예수님은 창조주이시며, 모든 만물을 다스리는 만왕의 왕이십니다. 병도 치료하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묻는 이유는 네 병을 치료해 주겠다는
말이었습니다. 그런데 한가지 방법에만 몰두해 있던 그 병자는 말합니다.
"물이 동할 때에 나를 못에 넣어 줄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
그는 예수님을 알지 못하였습니다. 많은 사람이 예수님의 소문(정보)을 듣고
그에게로 가서 자신의 병을 고치려는데 이 사람은 아직도 운명에 맡겨 인생을 살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래도 우리 사랑의 예수님은 그 영혼을 불쌍히 여기셔서 그를 치료해
주셨습니다.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이 명령으로 그 병자는 깨끗함을 받은 것입니다. 완전히 치료받았습니다. 비록
죄인이지만,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병자이지만 우리 예수님은 찾아와 주셔서 치료해
주셨습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목적은 잊어버리고 방법에만 얽매여 있지는 않습니까?
얼마든지 다른 방법이 있는데도 새로운 방법을 시도하는 일에 주저하고 있는 분은
없습니까? 예수님이라는 해결의 열쇠를 놔두고 운명에 맡겨 사는 사람은 없는지요?
지금이 현명한 판단을 해야할 때입니다.
3. 목적을 이루라
38년된 이 병자는 예수님의 명령대로 자리를 들고 걸어갔습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이 묻습니다. 왜 안식일인데 왜 자리를 들고 가느냐는 것입니다. 안식일에
일하는 것이 잘못되었다는 지적입니다. 그 병자는 핑계를 댔습니다. 나를 치료한
사람이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였다는 것입니다.
아담이 하와에게 죄를 전가하였던 것과 같습니다. 아담은 선악과를 먹으라고
하와가 줬을 때 스스로 그것을 거절할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선악과를 먹고는, 그
죄를 하와에게 돌렸던 것입니다.
38년된 병자는 자신을 치료한 사람에게 고맙다는 말을 하지는 못할지언정
자신에게 닥친 위기를 자신의 은인에게 전가시키려 하였습니다. 나중에 성전에서
예수님을 만난 후에 그는 유대인들에게 예수님을 고발합니다. 자신으로 하여금
자리를 들고 가게하여 안식일을 범하게 한 사람이 예수라는 사실을 고자질하였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죄인된 38년된 병자를 사랑하여 그의 병을 고쳐 주었건만, 그는 도리어
배반하였던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님이 그를 얼마나 사랑하셨는지. 예수님은 38년된 병에서
그를 자유롭게 하였으며, 병의 원인을 진단해 주시면서 다시는 병에 걸리지 말라고
권면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의 병이 죄때문이라고 말씀하시면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이쯤 되면 감격하여 회개할 만도 한데, 그는 회개하지 않고 계속 죄를
지었습니다. 예수님을 고발한 것이 바로 그 죄입니다. 그는 자신만 아는 사람이며,
은혜를 모르는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아무도 그를 연못에 넣어주지 않았던 이유도
여기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 누구도 이기적이고 감사할 줄 모르는 사람을 좋아할
까닭이 없습니다.
진정 죄란 무엇입니까? 헬라어로 죄는 '하마르티아'입니다. 이 말의 뜻은
'목적에서 벗어났다'는 것입니다. '과녁에서 빗나간 화살'을 말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칫솔로 밥을 먹을 수 있겠습니까? 제가 시험삼아 시도를 해보았지만
정말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칫솔은 양치를 하기 위해 만들어졌습니다. 하나님께서
천지를 지으실 때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만드셨습니다. 풀 한 포기 돌 하나라도
목적이 없는 것이 없습니다. 우리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나님께 찬송 드리는 목적을 가지고 지음 받았습니다.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함이니라"(사
43:21)
예수님께서도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하라고 하였습니다. 우리의
삶의 목적이 하나님 중심, 하나님 우선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 6:33)
우리는 이 목적을 잃어버려서는 안됩니다.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야합니다(고전 10:31).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이 사랑을 바탕으로 우리의 사명에 힘써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이를 위하여 부름을 받았습니다.
분명한 목적이 있는 사람은 목적을 잃어버리지 않습니다. 목적을 잃지 않는
사람은 보다 나은 방법을 찾아 창의적이고 능동적인 삶을 살아갑니다. 방법에
얽매이지 않고 운명에 맡겨 살지도 않습니다.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승리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2 예루살렘에 있는 양문 곁에 히브리 말로 베데스다라 하는 못이 있는데 거기 행각
다섯이 있고
3 그 안에 많은 병자, 소경, 절뚝발이, 혈기마른 자들이 누워 (물의 동함을 기다리니
4 이는 천사가 가끔 못에 내려와 물을 동하게 하는데 동한 후에 먼저 들어가는 자는
어떤 병에 걸렸든지 낫게 됨이러라)
5 거기 삼십팔 년 된 병자가 있더라
6 예수께서 그 누운 것을 보시고 병이 벌써 오랜 줄 아시고 이르시되 네가 낫고자
하느냐
7 병자가 대답하되 주여 물이 동할 때에 나를 못에 넣어 줄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
8 예수께서 가라사대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시니
9 그 사람이 곧 나아서 자리를 들고 걸어가니라 이날은 안식일이니
1.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 - 선택의 중요성
베데스다 연못에 38년이나 병을 앓던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의 목표는 병을
치료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병을 치료하기 위해 그는 연못이 동할 때 들어가고자
하였습니다. 천사가 가끔씩 내려와 물을 움직이는데, 이 때 연못에 제일 먼저
들어가는 사람은 무슨 병에 걸렸든지 다 나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치료의 방법은 많이 있습니다. 그가 선택한 것은 많은 방법중에 하나였습니다.
우리에게는 많은 정보가 있지만 그중 일부만을 선택하게 됩니다. 정보는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 정보를 바르게 선별하고 선택하는 것은 더욱 중요합니다.
손자는 2500년 전에 손자병법 13편 13번 용간(用間)편에 "승리의 핵심은
정보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정보를 얻는데 돈을 쓰지 않으면 멍청함의
극치라고 충고합니다. 그리고 정보를 잘 이용하는 사람은 ① 똑똑한 사람 ②
의리있는 사람 ③ 분석력이 있는 사람이라고 하였습니다. 정보를 잘 이용하는
사람이 승리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 38년된 병자는 많은 방법 중에 가장 미련한 방법을 택하였습니다.
38년동안 그 연못에 매여 성과가 없었으면 방법을 바꿨어야 하는데, 그는 한가지
방법밖에 모르는, 융통성이 없는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아마도 복권을 사는 사람과 같은 입장이었을 것입니다. 복권은 돈이 적게 들지만
운이 좋으면 일확천금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당첨될 확률은 거의 없습니다. 이
38년된 병자도 돈이 안드는 방법, 가장 손쉽게 치료되는 방법이라고 생각하여
베데스다 연못을 선택하였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의 방법은 잘못되었습니다. 운에 의지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지,
그는 몇번이고 체험하였을 것입니다. 연못이 동할 때 다른 사람이 먼저 들어가
버리는 것이었습니다. 아무도 그를 도와주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자신의 힘으로
들어가 보려고 했지만 환자의 몸으로 다른 사람보다 먼저 들어가는 것이 쉽지
않았습니다.
자! 여러분들 같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이정도 되면 다른 방법을 찾아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38년동안 그 병자는 융통성을 발휘하지 못하였습니다.
변화를 받아들이지 못하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에게는 돕는 사람이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38년동안 그곳에 있었으면 선배도 아마 대선배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아무도 그를 돕지 않았습니다. 그는 대인관계에서도 실패한 사람이었나
봅니다.
지금은 급변하는 정보화 시대입니다. 어제의 신제품이 내일의 고물이 되는
세상입니다. 바른 선택과 실천이 있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겸손하여
대인관계에서도 실패하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2. 방법보다 목적이 중요하다.
사람들은 목적을 세워놓고 그 목적을 이유기 위해 구체적인 방법을 세웁니다.
그런데 나중에는 그 방법에 얽매이다 자신의 목적을 잃어버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상갓집에 가서 그 유가족들을 위로한다고 통곡하여 울었습니다.
하도 애통해 하며 크게 우니 도리어 주위 사람들이 달래었습니다. 그 울던 사람이
하는 말
"그런데 누가 죽었죠?"
38년된 병자에게 예수님이 찾아가셨습니다. 한가지 밖에 모르는, 융통성이라고는
눈꼽만큼도 없는 그 사람에게 예수님께서 물었습니다.
"네가 낫고자 하느냐?"
예수님은 창조주이시며, 모든 만물을 다스리는 만왕의 왕이십니다. 병도 치료하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묻는 이유는 네 병을 치료해 주겠다는
말이었습니다. 그런데 한가지 방법에만 몰두해 있던 그 병자는 말합니다.
"물이 동할 때에 나를 못에 넣어 줄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
그는 예수님을 알지 못하였습니다. 많은 사람이 예수님의 소문(정보)을 듣고
그에게로 가서 자신의 병을 고치려는데 이 사람은 아직도 운명에 맡겨 인생을 살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래도 우리 사랑의 예수님은 그 영혼을 불쌍히 여기셔서 그를 치료해
주셨습니다.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이 명령으로 그 병자는 깨끗함을 받은 것입니다. 완전히 치료받았습니다. 비록
죄인이지만,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병자이지만 우리 예수님은 찾아와 주셔서 치료해
주셨습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목적은 잊어버리고 방법에만 얽매여 있지는 않습니까?
얼마든지 다른 방법이 있는데도 새로운 방법을 시도하는 일에 주저하고 있는 분은
없습니까? 예수님이라는 해결의 열쇠를 놔두고 운명에 맡겨 사는 사람은 없는지요?
지금이 현명한 판단을 해야할 때입니다.
3. 목적을 이루라
38년된 이 병자는 예수님의 명령대로 자리를 들고 걸어갔습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이 묻습니다. 왜 안식일인데 왜 자리를 들고 가느냐는 것입니다. 안식일에
일하는 것이 잘못되었다는 지적입니다. 그 병자는 핑계를 댔습니다. 나를 치료한
사람이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였다는 것입니다.
아담이 하와에게 죄를 전가하였던 것과 같습니다. 아담은 선악과를 먹으라고
하와가 줬을 때 스스로 그것을 거절할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선악과를 먹고는, 그
죄를 하와에게 돌렸던 것입니다.
38년된 병자는 자신을 치료한 사람에게 고맙다는 말을 하지는 못할지언정
자신에게 닥친 위기를 자신의 은인에게 전가시키려 하였습니다. 나중에 성전에서
예수님을 만난 후에 그는 유대인들에게 예수님을 고발합니다. 자신으로 하여금
자리를 들고 가게하여 안식일을 범하게 한 사람이 예수라는 사실을 고자질하였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죄인된 38년된 병자를 사랑하여 그의 병을 고쳐 주었건만, 그는 도리어
배반하였던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님이 그를 얼마나 사랑하셨는지. 예수님은 38년된 병에서
그를 자유롭게 하였으며, 병의 원인을 진단해 주시면서 다시는 병에 걸리지 말라고
권면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의 병이 죄때문이라고 말씀하시면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이쯤 되면 감격하여 회개할 만도 한데, 그는 회개하지 않고 계속 죄를
지었습니다. 예수님을 고발한 것이 바로 그 죄입니다. 그는 자신만 아는 사람이며,
은혜를 모르는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아무도 그를 연못에 넣어주지 않았던 이유도
여기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 누구도 이기적이고 감사할 줄 모르는 사람을 좋아할
까닭이 없습니다.
진정 죄란 무엇입니까? 헬라어로 죄는 '하마르티아'입니다. 이 말의 뜻은
'목적에서 벗어났다'는 것입니다. '과녁에서 빗나간 화살'을 말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칫솔로 밥을 먹을 수 있겠습니까? 제가 시험삼아 시도를 해보았지만
정말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칫솔은 양치를 하기 위해 만들어졌습니다. 하나님께서
천지를 지으실 때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만드셨습니다. 풀 한 포기 돌 하나라도
목적이 없는 것이 없습니다. 우리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나님께 찬송 드리는 목적을 가지고 지음 받았습니다.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함이니라"(사
43:21)
예수님께서도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하라고 하였습니다. 우리의
삶의 목적이 하나님 중심, 하나님 우선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 6:33)
우리는 이 목적을 잃어버려서는 안됩니다.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야합니다(고전 10:31).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이 사랑을 바탕으로 우리의 사명에 힘써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이를 위하여 부름을 받았습니다.
분명한 목적이 있는 사람은 목적을 잃어버리지 않습니다. 목적을 잃지 않는
사람은 보다 나은 방법을 찾아 창의적이고 능동적인 삶을 살아갑니다. 방법에
얽매이지 않고 운명에 맡겨 살지도 않습니다.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승리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