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댄동산 처럼
자신을 먼저 사랑하라 <경남정보대학 신앙강좌 모습>
물댄동산처럼
2002. 5. 23. 10:33
성경말씀 : 마태복음 22장 37-40절
37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38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39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40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1. 서론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모든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 즉 모든 성경의 골자를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의 말씀만 확실히 이해하면 성경 전체를
이해하는 것이 됩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의 말씀을 가지고 설교를 하려면
성경에서 하나님을 사랑한 모든 사람들의 얘기를 다 해야하고, 또 이웃 사랑을
실천한 모든 사람들의 얘기를 다 해야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 많은 얘기를 짧은
시간에 다 할 수 없습니다. 다만 부분적인 말씀만 드릴 수 밖에 없음을 안타깝게
생각합니다.
크고 첫째 되는 계명과 둘째 계명의 차이는 없습니다. 39절에 예수님께서도
둘째도 그와 같다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이 두 계명을 요약한다면 한마디로
사랑하라는 말씀입니다. 저는 이 사랑하라는 말씀 중에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말씀에 초점을 맞추어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성경에서는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였는데 안타깝게도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너무 많습니다. 자신을 아무렇게나 방치하고 있으며,
심지어는
자신을 학대하는 사람까지 있습니다.
2.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는 것처럼 자신을 사랑하십시오.
저는 이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사람을 장애인이라 말하지 않습니다. 병든
사람이라 말하지 않습니다. 다만 사랑 받지 못한 사람이 가장 불행한 사람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사랑을 받은 사람이 남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사랑 받지
못하고, 용서받지 못한 사람은 남을 사랑할 줄도 모르고 남을 용서할 줄도
모릅니다. 얼마나 불행한 사람입니까? 그러나 사랑받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사랑받음으로 활력이 넘치고, 사랑 받음으로 창조적인 사람이 됩니다.
[마음을 열어주는 101가지 이야기]라는 책에 "사랑의 힘"이라는 글이 있어서
소개해드리겠습니다.
어느 사회학과 교수가 자신의 강의를 듣는 학생들에게 과제물을 내었습니다.
볼티모어의 빈민가에 사는 청소년 200명의 생활환경을 조사하는 일이었습니다.
조사를 마친 학생들은 평가서를 써냈는데, 그 평가서의 내용은 모두
동일했습니다. "이 아이에겐 전혀 미래가 없다. 아무런 기회도 주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그로부터 25년이 지난 뒤 또 다른 사회학 교수가 이 연구조사를 접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 교수는 학생들에게 그 200명의 학생들이 지금 현재 어떤
삶을 살고 있는지 추적 조사하라는 과제를 냈습니다. 학생들의 조사 결과 놀라운
사실들이 밝혀졌는데요, 사망을 하거
나 다른 지역으로 이사간 20명을 제외하고
나머지 180명 중에서 176명이 대단히 성공적인 인생을 살아가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직업도 변호사와 의사와 사업가 등 상류층이 많았습니다.
이 사회학 교수는 너무 놀라서 조사를 더 진행시켰습니다. 다행히 그들 모두가
그 지역에 살고 있었고 사회학 교수는 그들을 한 사람씩 만나 직접 물어볼 수
있었습니다.
당신이 성공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는 질문에 대답이
모두 한결같았습니다. 바로 여선생님 한 분이 그 기적의 중심에 있었던 것입니다.
교수는 수소문 끝에 그 여교사를 찾아가서 물었습니다.
"도대체 어떤 기적적인 교육방법으로 빈민가의 청소년들을 이처럼 성공적인
인생으로 이끌었습니까?"
늙었지만 아직도 빛나는 눈을 간직한 그 여교사는 작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하였습니다 .
"그것은 정말 간단한 일이지요. 난 그 아이들을 사랑했답니다."
늙어서도 자신의 미소와 눈빛에 책임을 질 수 있는 방법은 무엇보다 자신과
더불어 타인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작은 사랑으로 말미암아 많은 이의
인생이 변화된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사랑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사람만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좀더 정확하게 말하면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은 사람만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 누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모든 사람을
사랑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죄인들이라고 햇볕을 비취지 않습니까? 교회 다니는
사람만 숨쉬도록 허락하십니까? 아닙니다. 죄인이든 의인이든 하나님은 모두를
사랑하십니다.
니느웨 성은 죄악의 도성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요나를 택하여 그들의
죄를 깨닫게 하셨고, 결국 회개시키지 않았습니까? 오죽 니느웨 사람들이
미웠으면 요나가 다시스로 도망가려고 했겠습니까? 반대로 오죽 우리 하나님이
니느웨 사람들을 사랑하셨으면 요나를 바다에 빠지게 하고, 물고기가 요나를
삼키게까지 하셨겠습니까?
요나를 한번 볼까요? 요나는 하나님께 불평을 하였습니다. 원수된 니느웨
사람들을 살리시는 하나님이 미웠던 것이지요. 그러나 하나님은 요나를 벌주려
하지 않으시고 도리어 박넝쿨과 벌레를 통하여 요나를 깨닫게 하십니다. 너는
심지도 않고 가꾸지도 않은 박넝쿨을 사랑했다. 그러나 니느웨 사람들은 내가
지은 나의 백성이다. 어찌 내가 사랑하지 않을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서 그 크신 사랑을 느낄 수 있습니다. 죄
없으신 예수님께서 이 땅에 내려와 갖은 모욕을 다 당하셨습니다. 힘이 없어서
당하신 고난이 아닙니다. 천군천사들을 데리고 와서 로마 병정들을 눈멀게도 할
수 있었으며, 십자가에서도 내려오실 수 있는 분이셨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갖은
수모와 모욕을 다 당하셨습니다. 채찍에 맞으셨으며, 침 뱉음을 당하셨고, 조롱을
당해야만 했습니다. 심지어는 십자가를 짊어지고 골고다 언덕을 올라야만 했으며,
두 손과 발에 못박혀 물한방울 피한방울 남김없이 다 흘려야만 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되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사랑해야 합니다. 여기서 다하여 사랑한다는 말은 남김없이, 아낌없이 사랑하라는
말입니다. 사랑을 하려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처럼 사랑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목숨을 다 내놓으면서까지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자신을 사랑하는 길입니다. 왜냐하면 창조주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것이 가장 큰 죄이기 때문입니다.
3. 자신을 사랑한다면 죽음의 자리에 서있지 않습니다.
왜 자신을 죽음의 자리에서 건지려 하지 않습니까? 왜 불안과 초조, 두려움과
염려 속에서 자신을 건지려 하지 않습니까? 누가 나를 이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 건져낼 수 있을까요? 내 힘으로? 내가 가진 도덕과 철학으로? 아니면
세상의 종교가 나를 구원할 수 있을까요?
저도 다른 종교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종교가 나를 자유롭게 하지
못하였습니다. 내 전생은 무엇이었을까? 혹시 술마시고 폭행을 일삼는 우리
아버지가 전생에 내가 기르던 개는 아니었을까? 나는 진리를 깨달았는가? 아니면
또 다른 진리가 있어서 새롭게 깨달아야 하는가? 수 없는 의문과 질문 속에서
저는 행복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만족함도 제게는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세계 4대 성인 중에 한 분이 아닙니다. 공자나 석가 소크라테스같은
성인이 아닙니다. 그는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라면
미치광이나 사기꾼일 수 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진리로 믿든지 아니면
사기꾼으로 밖에 볼 수 없는 것이, 그는 친히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하였으며(마 27:43), 죄를 사하는 권세를 가지고 있다고 말하였스니다(마 9:6),
그리고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갈 자가
없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요 14:6).
그렇습니다. 예수님 외에는 구원 얻을 만한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습니다(행 4:12).
4. 자신을 사랑한다면 거짓을 따르지 않습니다.
여러분들은 지성인입니다. 최고의 지성을 자랑하는 대학에 몸담고 있는
분들입니다. 무엇이 진리이고, 무엇이 거짓인지 분별할 수 있는 충분한 지각이
있으신 분들입니다. 하나님께서 구원 얻는 길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그것은
바로 성경입니다. 옛날 천주교회에서는 성경을 번역하였다고 화형을 시켰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누구든지 성경을 읽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는 시대는 옛말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사람이 이끄는 대로 구원의 길을 갈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그가 누구라 하더라도 불완전하기에 구원자가 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감동으로 쓰여진 성경은 그 누구도 폐하지 못합니다(요
10:35). 사도 바울도 디모데에게 권면하기를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고
하였습니다(딤후 3:15). 그리고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딤후 3:16-17)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5. 자신을 사랑한다면 자신을 높은 곳에 올려놓습니다.
"여호와 외에 누가 하나님이며 우리 하나님 외에 누가 반석이뇨 이 하나님이
힘으로 내게 띠 띠우시며 내 길을 완전케 하시며 나의 발로 암사슴 발 같게
하시며 나를 나의 높은 곳에 세우시며 내 손을 가르쳐 싸우게 하시니 내 팔이 놋
활을 당기도다"(시편 18:31-34)
자신을 원숭이나 아메바의 후손에 놓지 않습니다. 자신을 더러운 죄의 자리에
높지 않습니다. 가장 지고한 곳이 어디입니까? 하나님의 자녀라는 위치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나를 구원하기 위해 내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를 지셨다는 믿음의
반석위에 자신을 올려놓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