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댄동산 처럼
"신 죽음의 신학"을 말한다. 약간 어설프게 ^_^
물댄동산처럼
1999. 10. 20. 00:06
1960년대에 일어난 신학의 새로운 사조가 바로, 그리스도교 세속화와 신 죽음의 신학이다. 왜 이런 신학이 나왔는지 먼저 이해한다면 이 신학을 공부하는데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첫째는 급격하게 세속화된 현대교회 때문이다. 현대 교회가 기복신앙적으로 그 신앙의 본질이 변색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리가 점점 없어져가고, 하나님에 대한 관심도 점점 사라져 가는 것이다. 마틴 마티가 말한 것과 같이 "현대 세속주의의 논리는 근본에 있어서 무신론적"이되었다. 이론적으로 세워진 무신론이 아니라 실제로 무신론적인 삶을 사람들이 살고 있다는 것이다. 둘째는, 하나님의 개념과 현실의 모순이다. 부정부패와 악이 지배하는 사회 속에서 전능한 창조자를 의심하게 되는 것이다. 사랑의 하나님이, 선한 사람이 당하는 고통을 외면한다면 그 하나님의 사랑은 무력하다. 당연히 역사를 지배하는 선한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신앙이 흔들리는 것이다. 이러한 모순을 가지고는 세상사람들을 더 이상 설득할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이다.
신 죽음의 시대란 신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시대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신에 대한 신앙이 사람들의 삶에 대한 규정력을
잃어버린 시대를 말한다. 신앙을 잃어버린 것이 아니라, 우리
스스로의 필요에 따라 만든 신을 섬긴다는 데 문제가 있다.
램지가 말한 바와 같이 바하니안은 해밀턴이나 알타이저와
마찬가지로 '신이 죽었다'는 전제 위에서 신학과 문화를 세우려고 한
사람들 가운데 하나이다. 그러나 오늘날 이 선언은 반
그리스도적(anti-christian)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지나간(post-
christian) 시대라는 것이다. '서양인은 신학적으로만이 아니라
또한 문화적으로 그리스도교 이후적이다.
무실론은 이론만이 아니다. 문화적 무신론의 가능성은 종교를
포함한 문화의 모든 면의 독립과 내재주의에서 성취되었다.
오늘날의 시대가 문화적으로도 그리스도교 이후라는 것은 현대인은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이것은 우리가 신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이 아니라, 넘치게 가지고 있다는 것을 말한다.
오늘날 우리 그리스도교 이후의 시대 사람들은 매우 종교적인
사람들이다. 그러나 램지가 말한 바와 같이 "신은 찾아지고,
발견되고, 잃어지는 것(datum)"에 지나지 않는다. 바하니안은
이것을 인간이 선택한 신, 인간이 만든 신으로 본다. 이와 같은
신이 죽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만들어진 신, 곧 우상을
바하니안은 '종교성'이라고 부른다. 현대는 완전히 과학적
휴머니즘이 되었다. 그리스도교는 성서의 산 하나님을 잃고, 이
종교성이라는 쾌락주의(hedonsm)에 빠져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 시대는 이미 그리스도교 시대가 지나간 시대가 되었다. 현대
문화 속에서 그리스도교적 요소들은 죽고, 그 자리에 세속적인 것이
대신했다. 이와 같은 결과는 그리스도교 자신이 가져온 것으로
니체의 표현을 빌린다면, "너희들이 신을 죽인 것이다."고
바하니안은 보았다.
바하니안은 '신의 죽음'이라는 책에서 신이 참으로 죽음을 당할
수 있다는 것을 말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오늘날 그리스도교
이후의 시대에 있어서 신을 부정하는 것조차 관심이 없는 이
현대인 앞에서 그 발언권과 타당성을 잃은 현대 교회와 서양문화를
분석 비판하려고 하였다.
현대의 프로메테우스란 과학적 휴머니즘을 말한다. 바하니안에
의하면 이 시대는 반 그리스도교적이나 비 그리스도적 시대가
아니다. 그리스도교 신앙과 현대 인간 사이에는 상관이 없다. 신을
위해서나 신에 반항하는 투쟁을 위해서는 인간에게 신앙이
필요하다. 신앙이 죽었을 때 이러한 투쟁은 중단된다. 그리스도교
이후의 휴머니즘은 "신을 발견하라, 그러면 너 자신을 발견할
것이다"라는 그리스도교 주장에 반하여 "너 자신을 발견하라,
그러면 너는 신을 발견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라고 한다. 인간이
만물의 척도가 되고, 인간은 세계에 대해서 책임자로 주장하고
나선다. 인간이 신의 특권을 갖는다는 말이다. 이러한 무신론적
휴머니즘이 일어났는가 하면, 하나는 과학의 반동이고, 또 하나는
그리스도교 자체 안에서 일어난 그리스도교의 탈선이라고
바하니안은 보았다. 바하니안은 그 책임을 그리스도교 자체에 둔다.
기독교는 자연과 우주를 이해하기 위한 탐구의 방법으로 과학을
낳았다. 그리스도교는 신과 자연을 동일시하지 않고, 또 이러한
자연에 예배하는 것을 우상으로 보았다. 그리고 과학은 자연주의
자연 예배를 무능하게 하였다. 순전히 종교와 관계없이 말이다. 그
여파로, 인간은 신을 의지하지 않고도 자신을 이해하려고 하였다.
이제 사람들은 자신을 신에 대신하는 우주의 개념으로 이해하였다.
창조가 가능해졌기 때문이다. 결국 인간은 만물의 척도가 되었고,
새로운 구원자가 되려고 하였다.
바하니안에 의하면 현대의 과학적 휴머니즘은 현대 그리스도가
낳은 아들이다. 종교는 과학에 모순되지 않는다는 숨은 가정과 그
위에 일치하는 종교적 또는 영적 동력에 대해 강조하였다. 그러나
그리스도교는 19세기 인간이 직면하는 실제적 문제를 해결하려고
고심하었지만 지적으로 처신을 잘못했다. 세계를 승리적으로
쟁취하려고 한 그리스도교는 오히려 그 생명력을 잃었던 것이다.
바하니안은 복을 구하는 신앙을 우상적이며, 그리스도교의
부정을 구성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성서적 입장에서 신앙의 반대는
세속적인 일에 대한 우상적인 관심이다. 종교성은 신에 대한 관심을
자기 자신으로 대신하고, 그것을 신으로 섬기는 우상숭배이다.
그리스도교는 신의 이름 아래서 '실속 없는 자를 예배하였기 때문에
신의 죽음을 유산으로 남긴 것이다.
현대의 기독교는 성서 신앙의 본질을 상실하였으며, 고전적인
의미의 구원 대신에 마음의 평화, 물질적 성공이라는 세속주의적
구원을 제시하고 있다. 이것은 성서 신앙이 경계하고 있는 세속적인
가치이며, 우상숭배적인 관심이다. 이런 의미에서 신은 현대 세계의
풍부한 종교성의 늪에 빠져 죽고 말았다.
그러면 그리스도교 신앙과 현대인 사이에 아무 상관이 없어진
오늘날 이 상황 속에서 우리는 어떻게 할 것인가? 바하니안은
유일한 길을 "성서의 신앙으로, 성서의 산 하나님으로 돌아가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는 신의 죽음의 사실을 그대로 받고
고백하는 데에서 출발하는 것만이, 그리스도교가 가지는 고민을
해결하는 유일한 출구라고 하였다. 그 출구에의 가능성으로
그리스도교의 세속화와 비신화의 길을 제시한다.
세속성(secularity)와 세속주의(secularism)는 다르다.
바하니안은 세속주의를 부정하고 세속성을 강하게 요구한다.
왜냐하면, 이 세상을 떠나 서 있는 그리스도교의 형태는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루터가 '그의 직업을 통해서 신을 섬겨야 한다'고
주장하였던 것처럼 말이다. 여기에는 세속적 의무와 거룩한 의무,
사적 도덕과 공적 도덕 사이의 구별이 없다. 왜냐하면, 인간이
신에게 바치는 영적 면과 그가 종사하고 있는 세상의 면을
구별하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프로테스탄티즘이
세속성을 요구하는 까닭이다. 그러나 이것이 세속주의를 요구하는
것이 아니다. 세속성은 인간의 행동의 영역을 의미한다. 이것은
인간이 신의 형상으로 창조되었고, 본질적으로 신이 아니라는
사실을 반영한다. 세속성은 또한 인간이 자기 이해의 문화적 표현에
관계한다. 세속성은 종교가 그 타당성을 보여줄 수 있는 영역이고,
세속주의는 전도된, 또는 은폐된 종교적 태도이다. 세속주의는
일종의 종교성의 형태이며, 동시에 종교의 약탈이다. 만일
그리스도의 신앙이 세속성에서 떨어지면 그리스도교는 일종의
광신주의의 하나가 될 것이다.
바하니안은 그리스도교가 이 세상을 긍정해야한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타당성을 잃은 현대 그리스도 교회는 현대인의 자리에서
메시지를 주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생존할 길이 없다고 하였다.
이 점에서 그는 틸리히의 상관의 방법을 택하였고, 비판적인 자리에
서면서도 불트만의 비신화화론에서 해결의 길을 모색하였다. 복음이
진리로 부여되었다고 하면, 이 진리는 이제 타당성이 없어진 이
신화적 개념들로부터 독립하지 않으면 안 된다. 신화적 사고는 신의
간섭과 관련해서 인간의 본질을 이해하려고 하고 신을 인간의
관계에서 말한다. 그렇기 때문에 바하니안은 신약성서의 세계관의
신화적 거침을 깨뜨린 것이 본질적으로 그리스도교를 현대 세계에
타당하게 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보았다. 왜냐하면 현대인은 과학적
관심에 의해서 조건지어져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개인적으로는
이것을 반대한다. 성경의 사건을 신화로 돌리면, 역시 그리스도교는
인간이 만드는 종교가 된다. 과학화가 신을 죽게 만들었다고 하면서
이성적으로 그리스도교를 이해한다는 것은 역시 신을 죽이는
결과를 낳을 것이다.
결론적으로 바하니안은 성서의 신이 죽는 과정을 과학적으로
그리고 문화적으로 비판하여 그것이 특히 근대에 와서
그리스도교와 과학의 만남에 있어서 그리스도교 자체 안으로부터
독자성을 잃어버리고 그리스도교를 약화시킨 데에서 찾았다. 그것을
과학주의 또는 내재주의라는 표현으로 종합하였다. 그것은
그리스도교가 현대 정신과 타협, 또는 거기에의 적응에서 출발하여
종교성으로 떨어져 마침내는 인간의 신화를 가져왔다고 했다.
그래서 본질을 잃은 그리스도교는 오늘날에 와서는 아무 생명도
없고, 현대문화에서 그 자리를 잃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바하니안은 현대 그리스도교가 살아나갈 해결의
모색에서는 오히려 그리스도교와 세속을 구별하면서 그리스도교의
철저한 세속화를 주장한다. 그리고 신학과 철학의 동맹을 요구하고,
그리스도교의 신앙을 현대인에게 거리낌이 되지 않는 언어와
형태로 메시지를 전달하고자 하는 불트만의 비신화화와 철학적
도구들과, 실존적 질문을 그리스도교 신앙의 상관원리로 가지는
틸리히의 상관의 방법을 '그리스도교 이후'의 시대의 그리스도교의
출구의 하나로 보려고 하였다.
해방신학은 바하니안이 하나의 출구로 제시했던 '세속화'를
철저히 밀고 나가서 신이 우리에게 위탁한 이 세상을 변혁시키고
관리하는 책임자로서의 인간의 역할을 강하게 부각시키고 있다.
이런 측면에서 본다면 바하니안은 세계 신학의 큰 흐름의 뿌리를
이해하는 길잡이가 된다. 그러나 그에 따르는 악영향도 간과해서는
안된다. 예를 들면 폭력을 정당화한다거나, 의를 이루기 위해서
불의와 타협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간섭
속에서 사회 정의를 이루어야 할 것이다.
오늘날 한국 교회의 현실이 세속적 성공과 물질적 축복을
추구하는 '종교성'은 풍부하다. 그러나, 우리의 삶 속에서 명령을
내리시는 하나님의 음성에 대해서는 무관심하다. 이런 시대를 향해
외치는 예언자적 소리가 바로 신의 죽음이다. 우리는 신을 죽였다.
그러나 신은 죽지 않는다. 신의 간섭에서 벗어나려고 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 시편 2편의 말처럼 - 비웃을 것이다.
참고도서
가브리엘 바하니안, 김기석 역, [신의 죽음], 청하 출판사, 서울,
1988년.
박봉랑, [신의 세속화], 대한기독교출판사, 서울, 1992년.
신 죽음의 시대란 신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시대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신에 대한 신앙이 사람들의 삶에 대한 규정력을
잃어버린 시대를 말한다. 신앙을 잃어버린 것이 아니라, 우리
스스로의 필요에 따라 만든 신을 섬긴다는 데 문제가 있다.
램지가 말한 바와 같이 바하니안은 해밀턴이나 알타이저와
마찬가지로 '신이 죽었다'는 전제 위에서 신학과 문화를 세우려고 한
사람들 가운데 하나이다. 그러나 오늘날 이 선언은 반
그리스도적(anti-christian)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지나간(post-
christian) 시대라는 것이다. '서양인은 신학적으로만이 아니라
또한 문화적으로 그리스도교 이후적이다.
무실론은 이론만이 아니다. 문화적 무신론의 가능성은 종교를
포함한 문화의 모든 면의 독립과 내재주의에서 성취되었다.
오늘날의 시대가 문화적으로도 그리스도교 이후라는 것은 현대인은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이것은 우리가 신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이 아니라, 넘치게 가지고 있다는 것을 말한다.
오늘날 우리 그리스도교 이후의 시대 사람들은 매우 종교적인
사람들이다. 그러나 램지가 말한 바와 같이 "신은 찾아지고,
발견되고, 잃어지는 것(datum)"에 지나지 않는다. 바하니안은
이것을 인간이 선택한 신, 인간이 만든 신으로 본다. 이와 같은
신이 죽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만들어진 신, 곧 우상을
바하니안은 '종교성'이라고 부른다. 현대는 완전히 과학적
휴머니즘이 되었다. 그리스도교는 성서의 산 하나님을 잃고, 이
종교성이라는 쾌락주의(hedonsm)에 빠져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 시대는 이미 그리스도교 시대가 지나간 시대가 되었다. 현대
문화 속에서 그리스도교적 요소들은 죽고, 그 자리에 세속적인 것이
대신했다. 이와 같은 결과는 그리스도교 자신이 가져온 것으로
니체의 표현을 빌린다면, "너희들이 신을 죽인 것이다."고
바하니안은 보았다.
바하니안은 '신의 죽음'이라는 책에서 신이 참으로 죽음을 당할
수 있다는 것을 말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오늘날 그리스도교
이후의 시대에 있어서 신을 부정하는 것조차 관심이 없는 이
현대인 앞에서 그 발언권과 타당성을 잃은 현대 교회와 서양문화를
분석 비판하려고 하였다.
현대의 프로메테우스란 과학적 휴머니즘을 말한다. 바하니안에
의하면 이 시대는 반 그리스도교적이나 비 그리스도적 시대가
아니다. 그리스도교 신앙과 현대 인간 사이에는 상관이 없다. 신을
위해서나 신에 반항하는 투쟁을 위해서는 인간에게 신앙이
필요하다. 신앙이 죽었을 때 이러한 투쟁은 중단된다. 그리스도교
이후의 휴머니즘은 "신을 발견하라, 그러면 너 자신을 발견할
것이다"라는 그리스도교 주장에 반하여 "너 자신을 발견하라,
그러면 너는 신을 발견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라고 한다. 인간이
만물의 척도가 되고, 인간은 세계에 대해서 책임자로 주장하고
나선다. 인간이 신의 특권을 갖는다는 말이다. 이러한 무신론적
휴머니즘이 일어났는가 하면, 하나는 과학의 반동이고, 또 하나는
그리스도교 자체 안에서 일어난 그리스도교의 탈선이라고
바하니안은 보았다. 바하니안은 그 책임을 그리스도교 자체에 둔다.
기독교는 자연과 우주를 이해하기 위한 탐구의 방법으로 과학을
낳았다. 그리스도교는 신과 자연을 동일시하지 않고, 또 이러한
자연에 예배하는 것을 우상으로 보았다. 그리고 과학은 자연주의
자연 예배를 무능하게 하였다. 순전히 종교와 관계없이 말이다. 그
여파로, 인간은 신을 의지하지 않고도 자신을 이해하려고 하였다.
이제 사람들은 자신을 신에 대신하는 우주의 개념으로 이해하였다.
창조가 가능해졌기 때문이다. 결국 인간은 만물의 척도가 되었고,
새로운 구원자가 되려고 하였다.
바하니안에 의하면 현대의 과학적 휴머니즘은 현대 그리스도가
낳은 아들이다. 종교는 과학에 모순되지 않는다는 숨은 가정과 그
위에 일치하는 종교적 또는 영적 동력에 대해 강조하였다. 그러나
그리스도교는 19세기 인간이 직면하는 실제적 문제를 해결하려고
고심하었지만 지적으로 처신을 잘못했다. 세계를 승리적으로
쟁취하려고 한 그리스도교는 오히려 그 생명력을 잃었던 것이다.
바하니안은 복을 구하는 신앙을 우상적이며, 그리스도교의
부정을 구성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성서적 입장에서 신앙의 반대는
세속적인 일에 대한 우상적인 관심이다. 종교성은 신에 대한 관심을
자기 자신으로 대신하고, 그것을 신으로 섬기는 우상숭배이다.
그리스도교는 신의 이름 아래서 '실속 없는 자를 예배하였기 때문에
신의 죽음을 유산으로 남긴 것이다.
현대의 기독교는 성서 신앙의 본질을 상실하였으며, 고전적인
의미의 구원 대신에 마음의 평화, 물질적 성공이라는 세속주의적
구원을 제시하고 있다. 이것은 성서 신앙이 경계하고 있는 세속적인
가치이며, 우상숭배적인 관심이다. 이런 의미에서 신은 현대 세계의
풍부한 종교성의 늪에 빠져 죽고 말았다.
그러면 그리스도교 신앙과 현대인 사이에 아무 상관이 없어진
오늘날 이 상황 속에서 우리는 어떻게 할 것인가? 바하니안은
유일한 길을 "성서의 신앙으로, 성서의 산 하나님으로 돌아가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는 신의 죽음의 사실을 그대로 받고
고백하는 데에서 출발하는 것만이, 그리스도교가 가지는 고민을
해결하는 유일한 출구라고 하였다. 그 출구에의 가능성으로
그리스도교의 세속화와 비신화의 길을 제시한다.
세속성(secularity)와 세속주의(secularism)는 다르다.
바하니안은 세속주의를 부정하고 세속성을 강하게 요구한다.
왜냐하면, 이 세상을 떠나 서 있는 그리스도교의 형태는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루터가 '그의 직업을 통해서 신을 섬겨야 한다'고
주장하였던 것처럼 말이다. 여기에는 세속적 의무와 거룩한 의무,
사적 도덕과 공적 도덕 사이의 구별이 없다. 왜냐하면, 인간이
신에게 바치는 영적 면과 그가 종사하고 있는 세상의 면을
구별하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프로테스탄티즘이
세속성을 요구하는 까닭이다. 그러나 이것이 세속주의를 요구하는
것이 아니다. 세속성은 인간의 행동의 영역을 의미한다. 이것은
인간이 신의 형상으로 창조되었고, 본질적으로 신이 아니라는
사실을 반영한다. 세속성은 또한 인간이 자기 이해의 문화적 표현에
관계한다. 세속성은 종교가 그 타당성을 보여줄 수 있는 영역이고,
세속주의는 전도된, 또는 은폐된 종교적 태도이다. 세속주의는
일종의 종교성의 형태이며, 동시에 종교의 약탈이다. 만일
그리스도의 신앙이 세속성에서 떨어지면 그리스도교는 일종의
광신주의의 하나가 될 것이다.
바하니안은 그리스도교가 이 세상을 긍정해야한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타당성을 잃은 현대 그리스도 교회는 현대인의 자리에서
메시지를 주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생존할 길이 없다고 하였다.
이 점에서 그는 틸리히의 상관의 방법을 택하였고, 비판적인 자리에
서면서도 불트만의 비신화화론에서 해결의 길을 모색하였다. 복음이
진리로 부여되었다고 하면, 이 진리는 이제 타당성이 없어진 이
신화적 개념들로부터 독립하지 않으면 안 된다. 신화적 사고는 신의
간섭과 관련해서 인간의 본질을 이해하려고 하고 신을 인간의
관계에서 말한다. 그렇기 때문에 바하니안은 신약성서의 세계관의
신화적 거침을 깨뜨린 것이 본질적으로 그리스도교를 현대 세계에
타당하게 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보았다. 왜냐하면 현대인은 과학적
관심에 의해서 조건지어져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개인적으로는
이것을 반대한다. 성경의 사건을 신화로 돌리면, 역시 그리스도교는
인간이 만드는 종교가 된다. 과학화가 신을 죽게 만들었다고 하면서
이성적으로 그리스도교를 이해한다는 것은 역시 신을 죽이는
결과를 낳을 것이다.
결론적으로 바하니안은 성서의 신이 죽는 과정을 과학적으로
그리고 문화적으로 비판하여 그것이 특히 근대에 와서
그리스도교와 과학의 만남에 있어서 그리스도교 자체 안으로부터
독자성을 잃어버리고 그리스도교를 약화시킨 데에서 찾았다. 그것을
과학주의 또는 내재주의라는 표현으로 종합하였다. 그것은
그리스도교가 현대 정신과 타협, 또는 거기에의 적응에서 출발하여
종교성으로 떨어져 마침내는 인간의 신화를 가져왔다고 했다.
그래서 본질을 잃은 그리스도교는 오늘날에 와서는 아무 생명도
없고, 현대문화에서 그 자리를 잃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바하니안은 현대 그리스도교가 살아나갈 해결의
모색에서는 오히려 그리스도교와 세속을 구별하면서 그리스도교의
철저한 세속화를 주장한다. 그리고 신학과 철학의 동맹을 요구하고,
그리스도교의 신앙을 현대인에게 거리낌이 되지 않는 언어와
형태로 메시지를 전달하고자 하는 불트만의 비신화화와 철학적
도구들과, 실존적 질문을 그리스도교 신앙의 상관원리로 가지는
틸리히의 상관의 방법을 '그리스도교 이후'의 시대의 그리스도교의
출구의 하나로 보려고 하였다.
해방신학은 바하니안이 하나의 출구로 제시했던 '세속화'를
철저히 밀고 나가서 신이 우리에게 위탁한 이 세상을 변혁시키고
관리하는 책임자로서의 인간의 역할을 강하게 부각시키고 있다.
이런 측면에서 본다면 바하니안은 세계 신학의 큰 흐름의 뿌리를
이해하는 길잡이가 된다. 그러나 그에 따르는 악영향도 간과해서는
안된다. 예를 들면 폭력을 정당화한다거나, 의를 이루기 위해서
불의와 타협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간섭
속에서 사회 정의를 이루어야 할 것이다.
오늘날 한국 교회의 현실이 세속적 성공과 물질적 축복을
추구하는 '종교성'은 풍부하다. 그러나, 우리의 삶 속에서 명령을
내리시는 하나님의 음성에 대해서는 무관심하다. 이런 시대를 향해
외치는 예언자적 소리가 바로 신의 죽음이다. 우리는 신을 죽였다.
그러나 신은 죽지 않는다. 신의 간섭에서 벗어나려고 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 시편 2편의 말처럼 - 비웃을 것이다.
참고도서
가브리엘 바하니안, 김기석 역, [신의 죽음], 청하 출판사, 서울,
1988년.
박봉랑, [신의 세속화], 대한기독교출판사, 서울, 1992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