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댄동산 처럼
What is the incarnation for us?
물댄동산처럼
1999. 11. 9. 08:15
화육의 의미
What is the incarnation for us?
이오갑 (그리스도신대, 조직신학)
화육(化肉, incarnation)이란 육신으로 변화되었다는 뜻이다. 그러나 신학에서,
화육은 선재한 그리스도가 이 세상에 오신 사건을 말한다. 즉 화육은 영원한 하
나님의 아들인 천상의 그리스도가 인간의 육신으로 태어난 것이다.
1. 그리스도의 탄생보도들과 화육
마가복음은 예수의 탄생에 관해 침묵한다. 마태복음에는, 예수의 탄생이 구약
의 예언에 따라 이루어진 것이라는 점이 매사에 강조된다. 누가복음에서는 동정
녀탄생이 강조된다. 예수의 수태기사는 그의 메시야성이 강조된다. 요한복음에는
마태나 누가복음과 같은 종류의 탄생기사가 나타나지 않는다. 요한기자는 예수
의 활동시기를 복음서들과는 달리 "창조와 창조 이전"에서부터 본다. 그는 영원
한, 그리고 우주적인 관점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이해한다.
우리가 "화육"이라고 부르는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사건은 바로 요한복음의 1장, 특히 14절의 말씀
에 근거하고 있다.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 요한복음은 말씀을 영원전부터 하나님과 함께
존재했으며, 이 세상의 창조에도 함께 참여했으며, 그 안에 생명이 있었던 분이라고 소개한
다.
2. 고대의 신현설화들과 화육
화육사건은 우선 고대세계의 다양한 신현설화들을 떠올리게 한다. 그러나 예
수 그리스도의 화육사건은 주변 세계의 것들과는, 그리고 심지어는 구약성서의
것과도 전적으로 다르다. 예수 그리스도의 화육은 단순한 이야기가 아니라, 이
세계와 역사에 엄청난 충격과 변화를 가져온 유일무이의 사건이었다. 그 화육을
통해, 죽음과 어둠의 그늘이 짙게 깔린 이 세상에 빛이 들어오고, 생명과 구원
의 길이 열렸다.
3. 화육은 낮아짐의 사건이다
하나님의 아들 영원한 그리스도는 "육신(sarx)"이 되었다. 성서는 거기에다
어떤 신학적인 상징성을 부가해서, 육신을 인간이나 동물들이 공유하고 있는 피
조성 또는 의존성의 의미로 이해했다. 하나님이 인간이 되었다는 것, 그것은 낮아짐의 사건이다(빌 2:6-8). 그러나 우리가 더욱 주목하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이 인간들 중에서도 보잘것없는 사람
이 되었다는 사실이다. 하나님이 스스로 낮아지고, 인간이 되었으되, 가난한 나사렛의 목수
가 되었다. 그 예수 그리스도는 공생애 기간에도 자신을 '사람의 아들'로 인식했으며, 왕으
로 세우려는 사람들을 피해서, 혼자 있고자 했다.
4. 화육은 계시사건이다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 그 말씀, 영원한 그리스도는 영적이고, 신적인 존재인
반면, "육신"은 물질적이고, 세상적이다. 그래서 육신은 사람들이 보고, 접촉하
고, 직접 알 수 있다. 그점은 화육이 죄인들에게 있어서 축복의 계시사건임을
말해준다. 즉 이 세상을 넘어서는 것에 대해 무지한 죄인들에게 하나님께서 자
신의 존재와 뜻을 알려주기 위해서 직접 인간이 되었다는 사실이다. 요한기자가
화육의 보도를 통해 강조하는 것도 바로 그 계시사건이었다.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다. 그러나 독생하신 하나님, 화육하신 그리스도가 하나님을 나타냈다.
5. 화육은 구원사건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화육이 계시뿐만 아니라 구원의 문제와도 결부돼 있다는 점
을 깨닫는다. 만약 성자가 완전한 인간이 아니었다면, 그는 죄인을 위한 대속의
죽음을 당할 수 없다. 여기서 우리는 안셀름의 설명을 가져와야 한다. 정의로운
하나님은 죄를 용납할 수 없다. 그는 죄를 심판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또한 자
비로운 분이다. 그가 죄를 심판하는 한 인간들은 다 죽을 수 밖에 없다. 그가
인간에게 자비를 베풀기 위해 심판을 거둬들이면, 그는 또한 정의로운 자신의
존재와 모순된다. 거기서 하나님은 방법을 찾는다. 자신의 아들을 인간으로 보
내 그를 심판함으로써 자신의 의를 만족시키게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아들은
완전한 인간이 돼야 했다. 그는 진짜로 심판을 받고, 고통을 받고 죽어야 했다.
그래서 그 죽음으로 인해 하나님의 의를 만족시켜야 했던 것이다(만족설,
satisfaction).
6. 화육과 그리스도의 두 본성 문제
화육한 그리스도에 대한 그런 복잡한, 그리고 역설적인 이해는 많은 오해를
불러일으켰다. 오랜 토론과 논쟁 끝에 451년 칼케톤회의에서 그리스도는 "참 하
나님이자 참 인간"으로 정리 되었다. 신조는 말한다. "우리는 하나의, 유일한, 그
리고 같은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다. 우리는 두 개의 본성으로 존재하
지만, 그 본성들 사이에 혼합이나 변형이 없으며, 분리나 분열도 없다고 믿습니
다. 즉 신성과
인성으로 되어있지만 완전한 일치를 이룬 존재, 그래서 그 두 본성 사이에는 어떤 분열도,
혼합도 없는 존재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였다는 것이다.
7. 화육에서 찾는 실존적 '삶의 길'
최근에, 스페델은 해방신학자들의 그리스도론을 관찰하면서 그리스도의 성육
을 해방과 화해의 관점에서 해석한 바 있다.
거기서 그리스도의 화육은 구원의 총체성을 확증한다. 화육은 인간의 심리적이고 종교적
인 구원일 뿐만 아니라 불의한 사회의 해방까지를 지향한다. 그런데 그 해방은
곧 화해를 위한 출발점이다. 해방은 화해에서 완성되며, 화해는 해방의 목표이다. 물론 화
해도 역시 거기서는 단지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화해만이 아니라, 역사적이고 사회적인, 개
인적이고 심리적인, 그리고 환경적이고 생태학적인 화해까지를 의미한다. 우리는 거기서 그
리스도의 화육이 사회적이고 생태학적이며, 따라서 우주적인 지평으로까지 넓게 해석되고
있음을 발견한다.
화육은 우리들 모두에게, 아니 각자에게 주어진 삶의 길로 뚜렷하게 제시되고
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이 자신의 섭리에 따라 세상을 창조했고, 죄
인을 구원하고자 스스로 인간이 되었고, 죽었고, 부활했고, 그리고 최후의 날에
다시와서 세상을 완성하는 구원사의 방관자로만 존재하고 마는 사람들이 아니
다.
8. 화육의 세가지 '삶의 길'
그렇다면 그리스도가 화육에서 보여준 '삶의 길'은 무엇일까? 그것은 화육을
보고, 그 화육을 믿는 우리의 '삶의 길'이기도 하다.
첫째는 '떠남의 길'이다. 천상의 그리스도는 육신으로 이 세상에 내려왔다. 그
러기 위해 그는 하늘을 떠났다. 그는 하늘 보좌에서 영존할 수 있었으나, 그 자
리를 떠나 세상 한 귀퉁이의 인간의 자리로 왔다. 복음서를 들여다보면, 우리는
사실 그의 일생 전체가 '떠남'으로 점철되어 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그는
비천한 죄인으로 처형당하기 위해 예루살렘을 향해 떠나셨다. 그는 죽음으로부
터 승리하기 위해 굳건하게 닫힌 돌무덤도 밀치고 그곳을 떠났으며, 이 세상을
떠나 하늘로 올랐다. 그리고 그가 정한 날에 하늘을 떠나 다시 이곳에 내려올
것이다.
둘째는 '겸비의 길'이다. 앞에서, 그리스도의 화육은 낮아짐의 사건이라고 했
다. 그것은 곧 겸비 또는 자기비움을 말한다. 그리스도는 하늘을 버리고 이 세
상으로, 그것도 작고 보잘 것 없는 나라로 내려왔다. 그는 비천하고 고단한 삶
의 전형을 산 것이다. 그를 통해 그는 사람들에게 겸비의 삶을 보여주었다. 왜
그랬을까? 사람들이 겸비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주님이 낮아지셨다. 그
길이 인간에게 생명이 되고, 구원이 되는 길이기 때문이었다. 구원은 '낮아짐'으
로부터 온다. 낮아짐은 '높아짐'을 수반한다. 그럼으로써 낮아진 자는 하나님과
화해하고, 구원의 길을 가는 것이다.
셋째는 '수용의 길'이다. 그리스도의 화육은 인간의 육신을 받아들인 사건이다.
영원한 그리스도는 유한하고, 사멸할 수밖에 없는 육신을 용납하고, 자기의 것
으로 받아들였다. 그리고 그 육신과 함께, 또 그 육신으로써 나사렛 예수가 되
었다. 수용한다는 것, 특히 자기와 전혀 다른 것이라 할지라도 받아들인다는 것
그것처럼 아름다운 것은 없다. 그것은 곧 사랑이다. 예수는 세리와 죄인들도 수
용했다.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혀 온 여인도, 남편이 다섯인 수가성의 여인도 용
납했다. 중요한 것은 조건이 아니다. 도덕이나 관념도 아니다. 사랑이다. 사랑으
로써 사람을 수용하는 일만이 중요하다. 내 생각에 안 맞는다고 남들을 배제하
기 시작하면 그 때부터 세상은 지옥이 된다. 그리스도는 죄인들을 사랑해서 인
간이 되었다. 그는 사랑할 수 없는 죄인을 사랑해서 수용했다. 그럼으로써 그는
죄인들을 구원했다. 사랑만이, 사랑의 수용만이 구원하는 능력이 있다.
What is the incarnation for us?
이오갑 (그리스도신대, 조직신학)
화육(化肉, incarnation)이란 육신으로 변화되었다는 뜻이다. 그러나 신학에서,
화육은 선재한 그리스도가 이 세상에 오신 사건을 말한다. 즉 화육은 영원한 하
나님의 아들인 천상의 그리스도가 인간의 육신으로 태어난 것이다.
1. 그리스도의 탄생보도들과 화육
마가복음은 예수의 탄생에 관해 침묵한다. 마태복음에는, 예수의 탄생이 구약
의 예언에 따라 이루어진 것이라는 점이 매사에 강조된다. 누가복음에서는 동정
녀탄생이 강조된다. 예수의 수태기사는 그의 메시야성이 강조된다. 요한복음에는
마태나 누가복음과 같은 종류의 탄생기사가 나타나지 않는다. 요한기자는 예수
의 활동시기를 복음서들과는 달리 "창조와 창조 이전"에서부터 본다. 그는 영원
한, 그리고 우주적인 관점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이해한다.
우리가 "화육"이라고 부르는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사건은 바로 요한복음의 1장, 특히 14절의 말씀
에 근거하고 있다.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 요한복음은 말씀을 영원전부터 하나님과 함께
존재했으며, 이 세상의 창조에도 함께 참여했으며, 그 안에 생명이 있었던 분이라고 소개한
다.
2. 고대의 신현설화들과 화육
화육사건은 우선 고대세계의 다양한 신현설화들을 떠올리게 한다. 그러나 예
수 그리스도의 화육사건은 주변 세계의 것들과는, 그리고 심지어는 구약성서의
것과도 전적으로 다르다. 예수 그리스도의 화육은 단순한 이야기가 아니라, 이
세계와 역사에 엄청난 충격과 변화를 가져온 유일무이의 사건이었다. 그 화육을
통해, 죽음과 어둠의 그늘이 짙게 깔린 이 세상에 빛이 들어오고, 생명과 구원
의 길이 열렸다.
3. 화육은 낮아짐의 사건이다
하나님의 아들 영원한 그리스도는 "육신(sarx)"이 되었다. 성서는 거기에다
어떤 신학적인 상징성을 부가해서, 육신을 인간이나 동물들이 공유하고 있는 피
조성 또는 의존성의 의미로 이해했다. 하나님이 인간이 되었다는 것, 그것은 낮아짐의 사건이다(빌 2:6-8). 그러나 우리가 더욱 주목하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이 인간들 중에서도 보잘것없는 사람
이 되었다는 사실이다. 하나님이 스스로 낮아지고, 인간이 되었으되, 가난한 나사렛의 목수
가 되었다. 그 예수 그리스도는 공생애 기간에도 자신을 '사람의 아들'로 인식했으며, 왕으
로 세우려는 사람들을 피해서, 혼자 있고자 했다.
4. 화육은 계시사건이다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 그 말씀, 영원한 그리스도는 영적이고, 신적인 존재인
반면, "육신"은 물질적이고, 세상적이다. 그래서 육신은 사람들이 보고, 접촉하
고, 직접 알 수 있다. 그점은 화육이 죄인들에게 있어서 축복의 계시사건임을
말해준다. 즉 이 세상을 넘어서는 것에 대해 무지한 죄인들에게 하나님께서 자
신의 존재와 뜻을 알려주기 위해서 직접 인간이 되었다는 사실이다. 요한기자가
화육의 보도를 통해 강조하는 것도 바로 그 계시사건이었다.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다. 그러나 독생하신 하나님, 화육하신 그리스도가 하나님을 나타냈다.
5. 화육은 구원사건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화육이 계시뿐만 아니라 구원의 문제와도 결부돼 있다는 점
을 깨닫는다. 만약 성자가 완전한 인간이 아니었다면, 그는 죄인을 위한 대속의
죽음을 당할 수 없다. 여기서 우리는 안셀름의 설명을 가져와야 한다. 정의로운
하나님은 죄를 용납할 수 없다. 그는 죄를 심판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또한 자
비로운 분이다. 그가 죄를 심판하는 한 인간들은 다 죽을 수 밖에 없다. 그가
인간에게 자비를 베풀기 위해 심판을 거둬들이면, 그는 또한 정의로운 자신의
존재와 모순된다. 거기서 하나님은 방법을 찾는다. 자신의 아들을 인간으로 보
내 그를 심판함으로써 자신의 의를 만족시키게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아들은
완전한 인간이 돼야 했다. 그는 진짜로 심판을 받고, 고통을 받고 죽어야 했다.
그래서 그 죽음으로 인해 하나님의 의를 만족시켜야 했던 것이다(만족설,
satisfaction).
6. 화육과 그리스도의 두 본성 문제
화육한 그리스도에 대한 그런 복잡한, 그리고 역설적인 이해는 많은 오해를
불러일으켰다. 오랜 토론과 논쟁 끝에 451년 칼케톤회의에서 그리스도는 "참 하
나님이자 참 인간"으로 정리 되었다. 신조는 말한다. "우리는 하나의, 유일한, 그
리고 같은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다. 우리는 두 개의 본성으로 존재하
지만, 그 본성들 사이에 혼합이나 변형이 없으며, 분리나 분열도 없다고 믿습니
다. 즉 신성과
인성으로 되어있지만 완전한 일치를 이룬 존재, 그래서 그 두 본성 사이에는 어떤 분열도,
혼합도 없는 존재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였다는 것이다.
7. 화육에서 찾는 실존적 '삶의 길'
최근에, 스페델은 해방신학자들의 그리스도론을 관찰하면서 그리스도의 성육
을 해방과 화해의 관점에서 해석한 바 있다.
거기서 그리스도의 화육은 구원의 총체성을 확증한다. 화육은 인간의 심리적이고 종교적
인 구원일 뿐만 아니라 불의한 사회의 해방까지를 지향한다. 그런데 그 해방은
곧 화해를 위한 출발점이다. 해방은 화해에서 완성되며, 화해는 해방의 목표이다. 물론 화
해도 역시 거기서는 단지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화해만이 아니라, 역사적이고 사회적인, 개
인적이고 심리적인, 그리고 환경적이고 생태학적인 화해까지를 의미한다. 우리는 거기서 그
리스도의 화육이 사회적이고 생태학적이며, 따라서 우주적인 지평으로까지 넓게 해석되고
있음을 발견한다.
화육은 우리들 모두에게, 아니 각자에게 주어진 삶의 길로 뚜렷하게 제시되고
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이 자신의 섭리에 따라 세상을 창조했고, 죄
인을 구원하고자 스스로 인간이 되었고, 죽었고, 부활했고, 그리고 최후의 날에
다시와서 세상을 완성하는 구원사의 방관자로만 존재하고 마는 사람들이 아니
다.
8. 화육의 세가지 '삶의 길'
그렇다면 그리스도가 화육에서 보여준 '삶의 길'은 무엇일까? 그것은 화육을
보고, 그 화육을 믿는 우리의 '삶의 길'이기도 하다.
첫째는 '떠남의 길'이다. 천상의 그리스도는 육신으로 이 세상에 내려왔다. 그
러기 위해 그는 하늘을 떠났다. 그는 하늘 보좌에서 영존할 수 있었으나, 그 자
리를 떠나 세상 한 귀퉁이의 인간의 자리로 왔다. 복음서를 들여다보면, 우리는
사실 그의 일생 전체가 '떠남'으로 점철되어 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그는
비천한 죄인으로 처형당하기 위해 예루살렘을 향해 떠나셨다. 그는 죽음으로부
터 승리하기 위해 굳건하게 닫힌 돌무덤도 밀치고 그곳을 떠났으며, 이 세상을
떠나 하늘로 올랐다. 그리고 그가 정한 날에 하늘을 떠나 다시 이곳에 내려올
것이다.
둘째는 '겸비의 길'이다. 앞에서, 그리스도의 화육은 낮아짐의 사건이라고 했
다. 그것은 곧 겸비 또는 자기비움을 말한다. 그리스도는 하늘을 버리고 이 세
상으로, 그것도 작고 보잘 것 없는 나라로 내려왔다. 그는 비천하고 고단한 삶
의 전형을 산 것이다. 그를 통해 그는 사람들에게 겸비의 삶을 보여주었다. 왜
그랬을까? 사람들이 겸비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주님이 낮아지셨다. 그
길이 인간에게 생명이 되고, 구원이 되는 길이기 때문이었다. 구원은 '낮아짐'으
로부터 온다. 낮아짐은 '높아짐'을 수반한다. 그럼으로써 낮아진 자는 하나님과
화해하고, 구원의 길을 가는 것이다.
셋째는 '수용의 길'이다. 그리스도의 화육은 인간의 육신을 받아들인 사건이다.
영원한 그리스도는 유한하고, 사멸할 수밖에 없는 육신을 용납하고, 자기의 것
으로 받아들였다. 그리고 그 육신과 함께, 또 그 육신으로써 나사렛 예수가 되
었다. 수용한다는 것, 특히 자기와 전혀 다른 것이라 할지라도 받아들인다는 것
그것처럼 아름다운 것은 없다. 그것은 곧 사랑이다. 예수는 세리와 죄인들도 수
용했다.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혀 온 여인도, 남편이 다섯인 수가성의 여인도 용
납했다. 중요한 것은 조건이 아니다. 도덕이나 관념도 아니다. 사랑이다. 사랑으
로써 사람을 수용하는 일만이 중요하다. 내 생각에 안 맞는다고 남들을 배제하
기 시작하면 그 때부터 세상은 지옥이 된다. 그리스도는 죄인들을 사랑해서 인
간이 되었다. 그는 사랑할 수 없는 죄인을 사랑해서 수용했다. 그럼으로써 그는
죄인들을 구원했다. 사랑만이, 사랑의 수용만이 구원하는 능력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