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arton Ston's The Last Will and Testament of the Springfield Presbytery에 대하여 논하고, 그 신앙 문서가 주는 역사적, 신학적, 성서적 의미를 무엇인지를 평하라.
발톤 스톤과 그의 동역자들이 쓴 스프링퓔드 장로회의 최후의 유언은 무엇이며, 이 신앙 문서가 주는 역사적 신학적, 성서적 의미를 찾아보고자 한다. 이 문제들을 다루기 전에 이 문서가 쓰여진 배경을 살펴보고, 발톤 스톤의 신학적 사상과 함께 이 문서를 다루고자 한다.
발톤 스톤은 장로교회 소속 목사로서 뜨거운 선교 열정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부흥회를 많이 가졌는데, 가는 곳마다 많은 사람들이 회심하는 역사가 일어났다. 그러나 교단의 간섭을 받게 되었다. 발톤 스톤은 이러한 조직이 성서적이지 않음을 깨닫고, 자신이 속해있던 장로회를 떠나 그와 뜻을 같이한 사람들과 함께 스프링퓔드 장로회를 조직한다. 그러나 이것조차 성서적이지 않음을 깨닫고, 유언장과 함께 스프링퓔드 장로회의 문을 닫는다.
발톤 스톤이 교단의 조직을 통하여 느꼈던 부분들은 이렇다. 사람이 중심이 아닌 하나님 중심의 목회를 해야 한다. 조직이나 교권을 가지고 다른 사람의 설교, 즉 선교 열정을 가로막을 수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복음은 그 사람의 신앙적 양심에 따라야지 그 누가 간섭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목사라는 칭호 쓰기를 거절한다. 그리고 자유로이, 누구의 간섭을 받지 않고, 복음을 전할 수 있어야 한다. 인위적인 제도를 부인하는 것이다. 성서를 제일의 권위로 높이는 것이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한몸이기를 원하는 것이다. 교회의 권위를 높여 교회가 목회자를 선임할 수 있고, 자유롭게 목회자를 예우할 수 있도록 하였다.
이 문서가 주는 역사적인 의미는 그리스도의 교회가 주장하는 환원운동의 최초 문서가 된다는 것이다. 환원운동은 발톤 스톤부터 시작되었다고는 보지 않는다. 교회가 인위적으로 변하여 가고, 그런 가운데 본래의 모습을 되찾아야 한다는 생각과 노력을 하였던 사람들로부터 이미 환원운동은 시작된 것이다. 로마 카톨릭이 성서를 떠나고 교권을 높이며, 인본주의적으로 흘러갈 때, 종교개혁을 일으켰던 것도, 일종의 환원운동으로 본다면, 최초의 환원운동의 역사는 더 거술러 올라갈 것이다. 그러나 환원 운동이 교회 일치 운동이라고 했을 때는 발톤 스톤의 이 문서를 기점으로 환원운동의 시작을 볼 수 있다. 환원운동이라고 했을 때, 교회 일치 운동의 성격이 강하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종교 개혁자들과는 차원을 달리한다.
이 문서가 주는 신학적 성서적인 의미는 사람 중심의 신학에서 하나님 중심의 신학으로 그 방향을 전환하였다는 것이다. 장로회의 법이 있다면, 사람이 만든 그 법안에서 하나님을 이해하고 또한 설교해야 한다. 그러나 이러한 인위적인 법에서 탈피하여 오직 성서만을 가지고 하나님을 찾고, 자유로이 연구한다면, 그것이 바로 사람 중심에서 하나님 중심으로의 방향전환이라 할 수 있겠다.
이 문서는 문서로 끝나야 한다. 그리고 여기서 말하는 사상이나 신학도 성서를 넘어설 수 없다. 이 문서를 쓴 사람이 절대화 될 수 없으며, 이 문서가 교리가 될 수도 없다. 만일 그렇게 된다면, 법을 만들지 말라는 말이 또 법을 만드는 격이 되는 것이다.
발톤 스톤과 그의 동역자들이 쓴 스프링퓔드 장로회의 최후의 유언은 무엇이며, 이 신앙 문서가 주는 역사적 신학적, 성서적 의미를 찾아보고자 한다. 이 문제들을 다루기 전에 이 문서가 쓰여진 배경을 살펴보고, 발톤 스톤의 신학적 사상과 함께 이 문서를 다루고자 한다.
발톤 스톤은 장로교회 소속 목사로서 뜨거운 선교 열정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부흥회를 많이 가졌는데, 가는 곳마다 많은 사람들이 회심하는 역사가 일어났다. 그러나 교단의 간섭을 받게 되었다. 발톤 스톤은 이러한 조직이 성서적이지 않음을 깨닫고, 자신이 속해있던 장로회를 떠나 그와 뜻을 같이한 사람들과 함께 스프링퓔드 장로회를 조직한다. 그러나 이것조차 성서적이지 않음을 깨닫고, 유언장과 함께 스프링퓔드 장로회의 문을 닫는다.
발톤 스톤이 교단의 조직을 통하여 느꼈던 부분들은 이렇다. 사람이 중심이 아닌 하나님 중심의 목회를 해야 한다. 조직이나 교권을 가지고 다른 사람의 설교, 즉 선교 열정을 가로막을 수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복음은 그 사람의 신앙적 양심에 따라야지 그 누가 간섭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목사라는 칭호 쓰기를 거절한다. 그리고 자유로이, 누구의 간섭을 받지 않고, 복음을 전할 수 있어야 한다. 인위적인 제도를 부인하는 것이다. 성서를 제일의 권위로 높이는 것이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한몸이기를 원하는 것이다. 교회의 권위를 높여 교회가 목회자를 선임할 수 있고, 자유롭게 목회자를 예우할 수 있도록 하였다.
이 문서가 주는 역사적인 의미는 그리스도의 교회가 주장하는 환원운동의 최초 문서가 된다는 것이다. 환원운동은 발톤 스톤부터 시작되었다고는 보지 않는다. 교회가 인위적으로 변하여 가고, 그런 가운데 본래의 모습을 되찾아야 한다는 생각과 노력을 하였던 사람들로부터 이미 환원운동은 시작된 것이다. 로마 카톨릭이 성서를 떠나고 교권을 높이며, 인본주의적으로 흘러갈 때, 종교개혁을 일으켰던 것도, 일종의 환원운동으로 본다면, 최초의 환원운동의 역사는 더 거술러 올라갈 것이다. 그러나 환원 운동이 교회 일치 운동이라고 했을 때는 발톤 스톤의 이 문서를 기점으로 환원운동의 시작을 볼 수 있다. 환원운동이라고 했을 때, 교회 일치 운동의 성격이 강하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종교 개혁자들과는 차원을 달리한다.
이 문서가 주는 신학적 성서적인 의미는 사람 중심의 신학에서 하나님 중심의 신학으로 그 방향을 전환하였다는 것이다. 장로회의 법이 있다면, 사람이 만든 그 법안에서 하나님을 이해하고 또한 설교해야 한다. 그러나 이러한 인위적인 법에서 탈피하여 오직 성서만을 가지고 하나님을 찾고, 자유로이 연구한다면, 그것이 바로 사람 중심에서 하나님 중심으로의 방향전환이라 할 수 있겠다.
이 문서는 문서로 끝나야 한다. 그리고 여기서 말하는 사상이나 신학도 성서를 넘어설 수 없다. 이 문서를 쓴 사람이 절대화 될 수 없으며, 이 문서가 교리가 될 수도 없다. 만일 그렇게 된다면, 법을 만들지 말라는 말이 또 법을 만드는 격이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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