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댄동산 처럼

예수님의 겸손을 배우자 <우산 든 두 딸>

물댄동산처럼 2002. 4. 14. 07:53
예수님의 겸손을 배우자


이준행 목사(2002년 3월 12일 교직원채플)


본문말씀 : 마태복음 11장 29절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1. 서론
저는 오늘 교수님들 앞에서 무슨 말을 전할까 고민하다가 오늘 본문의
말씀을 중심으로 예수님의 겸손을 배우자는 제목으로 말씀을 전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랍비라는 말은 가르치는 선생님이라는 뜻도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
배우는 자라는 뜻도 있습니다. 진정한 스승은 배우는 자라는 뜻도 됩니다.
가르침이 없고, 배움이 없는 민족은 망할 수 밖에 없습니다. 배움이 얼마나
중요한지 한 랍비의 예화를 들려드리겠습니다.
서기 70년에 벤 자카이라는 유명한 랍비가 있었습니다. 그는 이스라엘을
정복하려는 로마 장군의 손에서 나라와 민족을 구할 수 있는 방법을
강구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 장군을 찾아가 학교만은 없애지
말아달라고 부탁하였습니다. 결국 그 제의가 받아들여져서 이스라엘은
멸망하였지만 학교만은 지킬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로마는 132년에 학문하는 유대인을 죽이라고 명령하였습니다.
아주 작은 나라 이스라엘이 가장 독립을 갈망하는 골칫덩이가 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사실 로마는 교육의 중요성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배우는 일에
소홀하지 않았습니다. 로마의 황제 시이저가 쓴 [갈리아 전기]에 보면
컬트족이 나옵니다. 컬트족은 로마에게 밀려 영국으로 건너가 영국을 세운
족속인데, 그들은 바지를 입고 있었으며, 전차를 사용하였습니다. 무기도
로마군이들의 무기보다 월등했습니다. 농사법도 발달하여 로마의 거의 모든
식물, 채소, 과일 등이 이들이 사용하던 말에서 유래되었을 정도입니다.
탈무드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당신이 지식을 늘리지 않는다면 그것은
곧 당신의 지식을 줄여가고 있는 결과가 된다"
저는 교수님들께 배움을 계속 해야한다는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세상의 많은 지식 가운데 특히 예수님의 겸손을 배우라고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2. 하나님이 인간의 자리까지 내려온 겸손을 배워야 합니다.
낮은 사람이 높은 자리에 올라가는 것과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이 낮은
자리로 내려 앉는 것 어느 것이 쉽겠습니까? 가난한 사람이 부자가 되면
어려움 없이 잘 적응합니다. 그러나 부자가 가난한 사람이 되면 적응하기가
힘듭니다.
하물며 하나님께서 인간의 몸으로 산다는 것이 얼마나 힘들겠습니까?
겸손은 자신을 포기하는 것이며, 불편을 감수하는 것이며, 고난을 자처하는
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자신의 모든 것을 포기하고 인간의
옷을 입고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빌립보서 2장 5절에서 8절에 보면,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하였습니다.

3. 사람 앞에서도 겸손한 예수님을 배워야 합니다.
세례 요한은 예수님을 증거하면서 자신은 그의 신발끈 풀기도 감당치
못하리라고 하였습니다. 신발끈을 푸는 일은 종이나 하는 일입니다.
다시말해 자신은 예수님 앞에서 종보다 못한 존재라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를 위대한 선지자로 생각하였는데, 그 위대한 선지자는 예수님
앞에서 종만도 못하다고 자신을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에게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요한도 내가 예수님께
세례를 받아야 하는데 어찌하여 제게 오셨나이까? 하고 도리어
반문하였습니다. 예수님의 요한에게 하나님의 의를 이루기 위함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의를 이루는 일을 위해 우리는 겸손해져야 합니다.

한번은 야고보의 어머니가 자신의 두 아들을 부탁하면서, 하나는 주의
오른편에 하나는 주의 왼편에 앉게 해 달라고 하였습니다. 이 때 제자들의
분위기가 어떠했겠습니까? 높아지려고 하는 그 사람 때문에 제자들 마음에
시기심과 미움의 긴장감이 감돌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대아에 물을 담아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실 때는
평화가 감돌았습니다. 높아지려하면, 갈등이 있지만, 낮아지려는 사람
앞에서는 평화가 있게되는 것입니다.

4. 형식이 아닌 내면의 겸손을 배워야 합니다.
우리는 흔히 겸손한 사람 하면, 순종하고 복종하는 사람을 떠올리게
됩니다. 스승의 가르침대로 하지 않으면 건방지고 버릇없다고 합니다.
당시 율법의 최고 권위자는 모세였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모세를 최고의
선지자로 믿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모세의 말을 그대로 따르지
않았습니다. 어떻게 보면 방자한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교만한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누구보다 모세를 잘 이해하였던
사람입니다. 모세의 뜻, 즉 하나님의 뜻을 바로 알고 계셨던 분입니다.
그래서 방자하게 보일지언정 그대로 따라하지 않은 것입니다. 우리는
겸손한 사람이 되어서 남의 좋은 것을 배워야합니다. 그러나 그대로
따라하는 것이 겸손은 아닙니다. 겸손은 남의 것을 그대로 모방한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 내면을 따르는 것이 진정한 겸손인 것입니다.
성경은 절대적인 권위를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자칫하다가는 내면에
담긴 하나님의 뜻을 보지 못하고 핵심을 놓치는 경우가 많습니다. 예수님의
겸손을 배워야 한다면서 단순히 제자들의 발만 씻는다고 그가 겸손한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처럼 제자들의 발을 씻기는 것도
중요하지만 예수님의 본래 의도를 본받고 따르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말입니다.

5. 결론
예수님께서 12명의 제자를 가르침으로 세계를 변화 시켰습니다. 그
원동력이 무엇이겠습니까? 바로 권세있는 가르침 때문입니다. 그 권세있는
가르침이 어디에서 나왔습니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말로만
가르쳤지만 예수님은 몸으로 직접 행함으로 가르치셨습니다. 그 겸손의
가르침이 세계를 변화시킬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하늘의 보좌를 버리고 이
땅에 내려와 사람들을 섬기며, 저들의 죄를 대신하여 희생 제물이 되신
예수님! 예수님은 오늘 우리에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그렇습니다. 교만은 서로를 망하게 하지만 겸손의 가르침은
세계를 변화시키는 힘이 됩니다.
경남정보대는 희망이 있습니다. 비전이 있습니다. 그 희망과 비전은
겸손한 예수님을 배우고 그 겸손으로 학생들을 지도하는 교수님들의
손에서 나오는 줄로 믿습니다.

기도
하나님 감사합니다. 우리 경남정보대학 교수님들을 통하여 유능한
인재들이 양육되게 하옵소서. 세계를 변화시키고, 한국의 미래를 짊어지고
나갈 젊은이들이 이곳에서 길러지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