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 철학, 수학, 신학 모두가 서로 다른 바탕 위에 세워진 학문입니다.
모든 학문에는 바탕이 되는 이론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바탕 위에서 다른 학문을 비판하면 안 됩니다.
과학자들에게 물어보십시오.
그들은 자신이 믿는 과학이
가장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학문이라고 말합니다.
이런 과학자들에게 다시 물어보십시오.
과학의 이론은 변함이 없느냐고.
열이면 열.
다, 과학의 이론은 변한다고 말할 것입니다.
과학에는 가설과 검증의 이론이 있습니다.
알 수 없는 것에 대하여 가설을 세우고,
그 가설을 실험을 통하여 검증합니다.
그리고 이론으로 확립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또 다른 실험을 통하여 그 이론이 변할 수도 있습니다.
철학에는 형이상학이 있습니다.
세계, 인생, 지식에 관한 근본적인 원리를 연구하는 것이 철학입니다.
그러나 근본적인 원리는 과학에서처럼 증명할 수 없습니다.
다만 사람이 바라는 바(이상)가 원리로 자리잡게 됩니다.
예를 든다면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여기에는 법칙이나 증명이 필요 없습니다.
다만 여기에서 말하고자 하는 의미가 중요합니다.
그러나 형이하학을 연구하는 과학자는 이를 비방할 수 있습니다.
'그럼, 생각하지 않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입니까?
전자제품은 생각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존재하지 않습니까?
당신의 철학은 잘못되었습니다. 이치에 맞지 않는 철학은 없어져야 합니다.'
과연 그런가요?
형이상학을 형이하학으로 바라보고 판단하면 안 됩니다.
다른 학문을 자신의 가치 기준으로 판단한다면 우스운 일이 벌어질 것입니다.
신학에는 믿음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믿음에서 신학은 출발합니다.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그 믿음은 검증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그 검증을 뒷받침합니다.
예수님은 역사적인 인물입니다.
그의 제자들 역시 역사적인 인물입니다.
기독교 역시 역사 속에서 만들어졌습니다.
세계사 속에서 기독교를 빼면 남는 것이 거의 없을 정도로
기독교의 영향은 막강합니다.
성경은 제자들이 꾸며낸 이야기가 아닙니다.
빌라도가 로마 황제에게 보낸
예수님에 관해 재판한 내용의 편지가 발굴이 되었고,
예수님의 빈 무덤이 부활을 증명합니다.
만일에 예수님의 부활이 없었다면
그리고 제자들이 예수님의 시체를 훔쳐갔다면
기독교의 복음은 많은 사람들에게 외면 당하였을 것입니다.
그 당시의 사람들도 성경을 읽었을 것인데
자신이 목격한 것과 다르다면 기독교를 믿을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성경이 제자들이 꾸며낸 이야기라면
어떻게 사건을 일치하게 꾸밀 수 있으며
그 거짓된 사건을 위하여 목숨까지 버릴 수 있었겠습니까?
참고적으로 요한 외의 모든 사도가 순교를 당하였습니다.
수학에는 약속이 있습니다.
이것이 수학 학문의 기초가 됩니다.
예를 들어 1더하기 1은 2라고 하였을 때
따지기 좋아하는 과학자는 이것을 가지고도 따질 것입니다.
'어떻게 1+1=2냐? 예를 들어봐라?'
'콩을 예를 들어, 하나의 콩과 다른 하나의 콩이 같으냐?
봐라 질량이 서로 다르지 않느냐? 0.00001의 차이가 있다.
세상에 똑같은 질량의 콩은 없다.
서로 다른 질량의 물질을 같다고 가정할 수도 없을 것이며,
서로 다른 질량의 물질을 더한다면 정확히 두 배가 되지 않는다.
에디슨도 이것을 이해하지 못하였다.
에디슨의 이론에 의하면
찰흙 하나에 찰흙하나를 더하면 더 큰 찰흙 하나가 된다.
그 외에도
물 한 컵에 알코올 한 컵을 섞으면 두 컵이 안 된다.
이러한 사실에 입각하여 수학은 학문적으로 문제가 있다.'
이렇게 따지는 사람 보셨습니까?
이런 식으로 1+1=2라는 법칙이 잘못됐다고 따질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따지는 사람은 없습니다.
만일에 이것을 따지고 든다면 바보라는 소리를 들을 것입니다.
수학의 기본을 이해하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수학 학문의 기본이 되는 약속을 존중하기 때문에
수학이 틀렸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수는 어떤 의미에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한다고 약속한 것입니다.
우리의 언어가 약속이듯이 수도 약속입니다.
우리 나라는 자신을 낳아준 사람을 '엄마' 혹은 '어머니'라고 하지만
미국은 Mother라고 합니다.
우리 나라 사람이
Mother라고 쓰는 미국 사람들에게 틀렸다고 말하지 않는 것은
그들의 약속을 인정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서로의 입장을 이해해야 합니다.
우리가 과학을 배우려면 과학이 말하는 기본적인 원칙을 인정해야합니다.
보이는 현상만을 따지겠다는데
검증된 것만을 믿겠다는데
그것을 가지고 이래라 저래라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저는 믿습니다.
하나님의 만든 자연을 연구하다보면
하나님을 더 잘 알 수 있을 것이라고 믿습니다.
모든 학문에는 바탕이 되는 이론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바탕 위에서 다른 학문을 비판하면 안 됩니다.
과학자들에게 물어보십시오.
그들은 자신이 믿는 과학이
가장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학문이라고 말합니다.
이런 과학자들에게 다시 물어보십시오.
과학의 이론은 변함이 없느냐고.
열이면 열.
다, 과학의 이론은 변한다고 말할 것입니다.
과학에는 가설과 검증의 이론이 있습니다.
알 수 없는 것에 대하여 가설을 세우고,
그 가설을 실험을 통하여 검증합니다.
그리고 이론으로 확립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또 다른 실험을 통하여 그 이론이 변할 수도 있습니다.
철학에는 형이상학이 있습니다.
세계, 인생, 지식에 관한 근본적인 원리를 연구하는 것이 철학입니다.
그러나 근본적인 원리는 과학에서처럼 증명할 수 없습니다.
다만 사람이 바라는 바(이상)가 원리로 자리잡게 됩니다.
예를 든다면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여기에는 법칙이나 증명이 필요 없습니다.
다만 여기에서 말하고자 하는 의미가 중요합니다.
그러나 형이하학을 연구하는 과학자는 이를 비방할 수 있습니다.
'그럼, 생각하지 않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입니까?
전자제품은 생각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존재하지 않습니까?
당신의 철학은 잘못되었습니다. 이치에 맞지 않는 철학은 없어져야 합니다.'
과연 그런가요?
형이상학을 형이하학으로 바라보고 판단하면 안 됩니다.
다른 학문을 자신의 가치 기준으로 판단한다면 우스운 일이 벌어질 것입니다.
신학에는 믿음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믿음에서 신학은 출발합니다.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그 믿음은 검증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그 검증을 뒷받침합니다.
예수님은 역사적인 인물입니다.
그의 제자들 역시 역사적인 인물입니다.
기독교 역시 역사 속에서 만들어졌습니다.
세계사 속에서 기독교를 빼면 남는 것이 거의 없을 정도로
기독교의 영향은 막강합니다.
성경은 제자들이 꾸며낸 이야기가 아닙니다.
빌라도가 로마 황제에게 보낸
예수님에 관해 재판한 내용의 편지가 발굴이 되었고,
예수님의 빈 무덤이 부활을 증명합니다.
만일에 예수님의 부활이 없었다면
그리고 제자들이 예수님의 시체를 훔쳐갔다면
기독교의 복음은 많은 사람들에게 외면 당하였을 것입니다.
그 당시의 사람들도 성경을 읽었을 것인데
자신이 목격한 것과 다르다면 기독교를 믿을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성경이 제자들이 꾸며낸 이야기라면
어떻게 사건을 일치하게 꾸밀 수 있으며
그 거짓된 사건을 위하여 목숨까지 버릴 수 있었겠습니까?
참고적으로 요한 외의 모든 사도가 순교를 당하였습니다.
수학에는 약속이 있습니다.
이것이 수학 학문의 기초가 됩니다.
예를 들어 1더하기 1은 2라고 하였을 때
따지기 좋아하는 과학자는 이것을 가지고도 따질 것입니다.
'어떻게 1+1=2냐? 예를 들어봐라?'
'콩을 예를 들어, 하나의 콩과 다른 하나의 콩이 같으냐?
봐라 질량이 서로 다르지 않느냐? 0.00001의 차이가 있다.
세상에 똑같은 질량의 콩은 없다.
서로 다른 질량의 물질을 같다고 가정할 수도 없을 것이며,
서로 다른 질량의 물질을 더한다면 정확히 두 배가 되지 않는다.
에디슨도 이것을 이해하지 못하였다.
에디슨의 이론에 의하면
찰흙 하나에 찰흙하나를 더하면 더 큰 찰흙 하나가 된다.
그 외에도
물 한 컵에 알코올 한 컵을 섞으면 두 컵이 안 된다.
이러한 사실에 입각하여 수학은 학문적으로 문제가 있다.'
이렇게 따지는 사람 보셨습니까?
이런 식으로 1+1=2라는 법칙이 잘못됐다고 따질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따지는 사람은 없습니다.
만일에 이것을 따지고 든다면 바보라는 소리를 들을 것입니다.
수학의 기본을 이해하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수학 학문의 기본이 되는 약속을 존중하기 때문에
수학이 틀렸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수는 어떤 의미에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한다고 약속한 것입니다.
우리의 언어가 약속이듯이 수도 약속입니다.
우리 나라는 자신을 낳아준 사람을 '엄마' 혹은 '어머니'라고 하지만
미국은 Mother라고 합니다.
우리 나라 사람이
Mother라고 쓰는 미국 사람들에게 틀렸다고 말하지 않는 것은
그들의 약속을 인정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서로의 입장을 이해해야 합니다.
우리가 과학을 배우려면 과학이 말하는 기본적인 원칙을 인정해야합니다.
보이는 현상만을 따지겠다는데
검증된 것만을 믿겠다는데
그것을 가지고 이래라 저래라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저는 믿습니다.
하나님의 만든 자연을 연구하다보면
하나님을 더 잘 알 수 있을 것이라고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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