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댄동산 처럼

백부장의 기도 - 8월 19일 주일낮예배 설교

물댄동산처럼 2001. 8. 24. 12:21
마태복음 8장 5~13절 말씀

1. 기적은 기도로 시작된다
백부장의 하인이 중풍병에 걸렸는데 누가 그 병을 순식간에 고칠 수 있겠습니까?
기적 같은 일들이 매일 일어나기를 원하십니까? 그러면 기도하십시오.
“이르시되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유가 나갈 수 없느니라 하시니라”(막 9:29)
벙어리되고 귀먹은 귀신이 무엇으로 떠나갔습니까? 기도입니다. 제자들은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였지만 예수님은 하셨습니다. 제자들이 그 연유를 묻자 예수님은 기도외에는 이런 기적이 나갈 수 없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진정 사람다운 사람으로 살기를 원하십니까? 그러면 기도하십시오.
짐승하고 사람하고 다른 것이 무엇입니까? 종교입니다. 종교의 핵심은 무엇입니까? 기도입니다. 다른 종교도 기도가 있지만 기독교의 기도와 다릅니다. 다른 종교는 자신의 복을 위해서 기도하지만 우리 기독교는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합니다. 기독교의 기도는 하나님의 사역을 위한 도구입니다.
톨스토이는 18세 신앙을 버렸는데, “나의 지나간 55년간 살아오는 동안 내 인생의 최초의 15년간의 소년기를 제외하고는 나는 안식을 경험하지 못 했다.”고 고백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나는 종교로 돌아온 것이 아니다. 나는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돌아 왔다. 그리고 예수 안에서 나는 다시 참된 안식을 발견했다.”

짐승이 사람 되는 것 이것이 기적이 아닙니까? 죄인이 아무 공로 없이 죄사함 받는 것 이것이 기적이 아닙니까?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이 구원받는 것, 마귀의 자녀가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 이보다 더 큰 기적이 어디 있습니까? 기도하십시오. 하나님께서 우리의 영혼을 돌아보실 것입니다.

2. 예수님을 만남으로 기도가 이루어진다.
그 하인의 주인, 즉 백부장이 예수님을 찾아갔습니다. 언제 주님이 또 가버나움을 지나갈지 모르는 일입니다. 지금 하인을 고치지 않으면 영영 그 병을 고칠 수 없을지도 모릅니다.
백부장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습니다. 기회를 놓치지 않은 것입니다. 바로 지금이 기회인 것입니다.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계 3:20)

기도는 대화라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일방적인 독백에 그치는 경우가 많습니다. 예수님이 듣고 계신다는 믿음도 없이 기도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어떻습니까? 기도할 때 주님을 만나면서 기도합니까? 아니면 형식적으로 기도합니까?
한 청년이 주님께서 가르쳐주신 기도문을 가지고 기도를 합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나 불렸니?” “아이참 하나님 저는 지금 주기도문 외우는 중이란 말이에요.” “나 부른게 아니구?”
여기서 아버지는 ‘아바’를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쓰시던 아람어에는 ‘아버지’ 혹은 ‘아버님’과 같은 엄숙한 단어가 없습니다. 다만 ‘아바’입니다. 아주 친근한 단어입니다. ‘아빠라고 번역해도 좋은 단어입니다. 구약의 사람들은 하나님을 아주 두려운 존재로, 거룩한 존재로 여겨왔습니다. 우리하고는 다른 아주 높은 자리에 계신 분으로 여겨왔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아주 가깝게 하나님을 부르셨습니다. 하나님은 아주 멀리 계신 분이 아닙니다. 너무 가까이 계셔서 우리의 생각까지도 다 아시는 분이십니다.

3. 겸손한 자세로 구하였습니다.
백부장은 예수님을 집에 모시는 일조차 감당할 수 없다고 말하였습니다. 자신은 로마인이요, 백부장이라는 신분을 가졌으면서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불렀습니다.

‘티모시 맥베이’라는 사람은 미국의 오클라호마 주 청사를 폭발물로 습격해서 1백여명의 수많은 사람을 죽였는데, 그가 독극물 주사로 사형을 당하기 전에도 끝까지 자기 죄는 뉘우치지 않았고, 자기의 행동에 대해서. 영국의 윌리암 어네스티 헨리의 시를 인용하면서 “나는 내 운명의 주인, 그리고 내 영혼의 선장”이라는 말을 남기고 죽었습니다.
그에 대하여 필립 얀시는 “티모스 맥배이의 불행은 단순히 인생을 잘못 살아왔던 한 청년의 비극이 아니라 바로 세속적 인본주의에 고무된, 그 이단사상의 피해자로 보아야 한다”하면서, 크리스천 잇 투데이에 이런 글을 남겼습니다. “당신이 불행해 지기를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신을 추방하십시오. 신을 거절하십시오. 그리고 기도를 거절하십시오. 그러나 정말 행복해 지기를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하나님을 당신의 인생의 주인으로 복귀시키십시오. 그리고 그 하나님 앞에 엎드려 기도하는 것을 배우십시오.”
중세기에 세워진 유럽의 어떤 수도원에 프레어 챔버라는 기도방 현판에 “네 삶이 가난해도 나를 원망치 말라”는 제목의 글이 새겨져 있었다고 합니다.

네 삶이 가난해도 나를 원망치 말라
너는 나를 주라고 부르면서 나를 주인 삼지 않았고
너는 나를 진리라고 하면서 내게 배우지 않았고
너는 나를 빛이라고 하면서 나를 바라보지 않았고
너는 나를 길이라고 하면서 나를 따라오지 않았고
너는 나를 능력이라 하면서 나를 의지하지 않았고
너는 나를 응답이라고 하면서 기도하지 않았나니.
자신에게 한번 물어보십시오. 나는 교만하여서 기도하지 않는가? 아니면 기도하지 않기 때문에 교만한가?

4. 믿음으로 구하십시오.
백부장은 놀라운 신앙 고백을 하였습니다.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그러면 내 하인이 낫겠삽나이다”
이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이 무엇입니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만나 보지 못하였노라”
이방인이 유대인보다 더 믿음이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동서로부터 많은 사람이 이르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천국에 앉으려니와 나라의 본 자손들은 바깥 어두운 데 쫓겨나 거기서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믿음 없는 기도는 헛된 기도입니다. 예수님은 말씀만으로도 치료하시는 분이십니다. 그 하인의 얼굴을 보지 않아도 그 상태를 듣지 않아도 병을 고칠 수 있는 분이십니다. 의사라면 어떻게 할까요? 언제부터 그랬습니까? 나이는 몇살이며, 증세가 어떻습니까? 등등등 물어보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예수님은 그 종의 성별도 이름도 나이도 묻지 않고 바로 고쳐주셨습니다. 할렐루야.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으니 이런 사람은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라”(약 1:6,7)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막 11:24)
“너희가 기도할 때에 무엇이든지 믿고 구하는 것은 다 받으리라 하시니라”(마 21:22)
어쩌면 우리의 기도가 하나님 앞에 상달된 것이 하나도 없을 수 있습니다. 믿음으로 구하지 않은 기도는 하나님 앞에 상달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맡기는 것입니다. 내 모든 염려 근심 걱정을 내어 맡기지 못한다면 그래서 계속 근심 걱정을 가지고 있다면 그는 믿음으로 기도하지 않은 것입니다.

세상에는 응답되지 않는 기도가 둘 있는데, 첫째는 믿음 없는 기도요. 다른 하나는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하는 기도입니다(약 4:3). 여기에는 남을 용서하지 않으며 하는 기도(막 11:25), 외식하는 기도(막 12:40), 화목하지 않으면서 하는 기도가 해당됩니다(마 5:23-24).

5. 결론
루터는 하루에 2시간씩 기도를 하였습니다. 그는 바쁜 날일수록 기도를 더했습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기도는 시간이 남아야 하는 것입니까? 마음은 원이지만 육신이 약하여서 못합니까? 그러면 가난하여도 하나님을 탓하지 마십시오. 기적이 일어나기를 기대하지 마십시오. 사람답게 살기를 기대하지 마시며, 천국도 꿈꾸지 마십시오. 믿음 없는 사람이 어떻게 기도할 수 있으며, 기도하지 않는 사람이 어떻게 천국에 들어갈 수 있겠습니까?
정말 인간다운 삶을 살기 원하시는 분만 기도하십시오. 정말 모든 문제를 해결 받고 기적을 체험하시기 원하시는 분만 기도하십시오. 영혼의 구원과 모든 문제의 해결이 기도에 달려있다고 믿는 분만 기도하십시오. 기도는 하나님의 능력을 인정하는 것이요. 자신의 낮추는 겸손입니다.
오늘 백부장처럼 자신의 문제도 해결 받고 예수님께 칭찬도 받는 귀중한 믿음의 사람, 기도의 사람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기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