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댄동산 처럼

<설교> 부자와 나사로

물댄동산처럼 2000. 4. 4. 16:24


본문 : 눅 16:19-31
주제 : 재물을 선하게 사용하자.
찬송 : 447(오 놀라운 구세주), 450(자비하신 예수여)

우리는 흔히 이 본문의 말씀을 들으면, '아 천국과 지옥에 관한 말이구나'하고
생각을 합니다. 많은 목회자들이 그렇게 설교해 왔습니다. 저는 각도를 바꿔
재물을 선하게 사용하자는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왜냐하면, 이 비유가 재물을
좋아하는 바리새인들을 경고하기 위한 예수님의 의도를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예화가 있기 바로 전에 예수님은 '약삭빠른 청지기'의 비유로 무엇을 말씀
하셨는지 아십니까? 16장 9절에 '불의한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불의한 재물은 '마몬나'(mamwna')는 '하늘의 보화'에
반대되는 개념으로서 '불의한 방법으로 얻은 재물'이라기 보다는 '단순한 재물'을
뜻합니다. 그리고 '친구를 사귀라'는 말은 세상사람들이 유익을 얻기 위해 투자를
하듯이, 천국에서 유익을 얻기 위하여 재물을 이용하는 법을 배우라는 말이
됩니다. 다시 말하여 재물을 가난한 이웃에게 나누어주어 '하늘에 보물을
쌓으라'는 말입니다.

본문 누가복음 16장 25절 말씀을 보면 "아브라함이 가로되 얘 너는 살았을
때에 네 좋은 것을 받았고 나사로는 고난을 받았으니 이것을 기억하라 이제 저는
여기서 위로를 받고 너는 고민을 받느니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 말씀을 잘못
오해하면, 마치 부자는 지옥에 가고, 가난한 사람은 천국에 간다는 말로
오해하기가 쉽습니다. 그러나 성경 어디에도 가난이 천국에 가는 필수
요건이라고 말하지 않고 있습니다.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것임이요'(눅 6:20)라는 말도 가난한 자만이 천국에 간다는 말이 아닙니다.
나사로가 아브라함의 품에 안긴 이유는 따로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이 말했던
것처럼 모세와 선지자의 말을 들었기 때문입니다(29절). 여기서 들었다는 말은
귀로 듣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깨닫고 행하는 것까지도 포함하여 하는
말입니다.
나사로나 부자나 모두 아브라함의 자손이었습니다. 그러나 부자는 모습은
아브라함의 자손이었는지는 몰라도, 내면은 그렇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왜
그랬습니까? 세상의 재물이 그를 눈멀게 하였기 때문입니다. 무엇으로 알 수
있습니까? 19절에 부자는 날마다 호화로이 연락하였다고 했습니다. 신앙 생활을
오래 해 보신 분이라면 다 아시겠지만, 신앙은 어려울 때 더 뜨거운 법입니다.
저도 안일하고 편안할 때보다 힘들고 어려울 때 하나님을 더욱 가까이 하게 되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재물은 우리에게 없어서는 안될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재물을 지나치게 사랑할 때 재물은 우리와 하나님의 사이를 갈라놓게
만들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마태복음 6장 24절에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 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며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며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잠언 기자는 "나로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시고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내게 먹이시옵소서 혹 내가 배불러서 하나님을
모른다 여호와가 누구냐 할까 하오며 혹 내가 가난하여 도적질하고 내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할까 두려워함이니이다"(잠 30:8-9)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재물을 하나님보다 더 사랑해서는 안됩니다.
부자는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을 입고 날마다 호화로이 연락하였다고 했는데, 그
자색옷이 어떤 옷입니까? 왕이나 귀족들이 입는 옷입니다. 때로는 우상의 옷에
수놓기도 했을 정도로 귀한 옷입니다. 얼마큼 귀한 옷일까요? 두로의 해안에서는
희귀한 조개가 잡힙니다. 그 귀한 조개에서 값진 자주색 물감이 나오는데, 한
조개에서 한 방울씩의 물감 밖에 나오지 않는 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귀합니까. 그리고 고운 베옷도 마찬가지입니다. 애굽산 세마포로 만든 속옷인데,
같은 무게라면 금의 두배나 되는 값을 받을 정도로 귀한 옷입니다. 이런 귀한
옷을 입고, 날마다 호화로이 연락하였다는 말은 일하지 않고 살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수고하여야 땅의 소산을 얻도록 하셨습니다(창 3:17). 부자가 이렇게
호화로이 연락하기 위해 다른 사람들이 수고하여야만 하였을 것입니다. 지금처럼
정보화 사회가 아닌 농경 사회에서는 더욱 그러했을 것입니다.
한편 그 집 문간에는 악성 종기에 시달리는 거지가 잠잘 곳과 먹을 것이 없어,
대문에 누워 이슬을 맞으며,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것을 기다리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것이 무엇입니까? 부자들은 먹지도 않는
음식이었습니다. 부자의 식탁에 앉은 손님들은 손가락에 묻은 기름을 없애기
위해 빵조각을 사용하곤 했습니다. 이 빵조각들은 고기나 육즙에 집어넣을 수
없음은 물론 먹지도 않는 것입니다. 다만 상 밑으로 그것을 던져 버리는 것이
관례였습니다. 나사로는 이것을 먹고살았던 것입니다.
부자에게는 이런 나사로가 눈에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나사로를
하나님의 징벌을 받는 죄인처럼 취급을 하였습니다. 무엇으로 알 수 있습니까?
개들이 와서 그 헌데를 핥았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개는 '퀴온'(kuvwn)으로서 주인
없이 거리를 헤매는 사나운 개를 말합니다. 유대인은 이와 같이 들개에게
시달리는 사람을 보통 하나님께 징벌을 받아서 고통을 당한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입니다.
무엇이 부자를 이렇게 만들었습니까? 재물이 많으면 하나님이 그만큼 축복한
것입니까? 예수님은 머리 둘 곳조차 없었던 분입니다. 하나님의 축복은 물질의
많고 적음에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부자에게 있어서 많은 재물은 그를 교만하게
만들었습니다. 하나님 없어도 재물만 많으면 살 수 있다는 생각을 하였을
것입니다. 재물은 사람에게 특권 의식을 갖게 합니다. 가난한 사람에게 관심을
갖는 사람은 가난을 아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자선 냄비에 돈을 넣는 사람은
부자가 아니라 가난한 이웃들이 더 많은 것을 봅니다. 가난한 자의 암양 새끼를
빼앗은 사람은 가난한 사람이 아니라 부자였습니다. 자기의 것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힘이 없는 자의 것을 빼앗은 것입니다(삼하 12장).

결론의 말씀입니다. 야고보서 2장 5절부터 9절의 말씀을 보면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들을지어다 하나님이 세상에 대하여는 가난한 자를 택하사 믿음에
부요하게 하시고 또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나라를 유업으로 받게
아니하셨느냐 너희는 도리어 가난한 자를 괄시하였도다 부자는 너희를 압제하며
법정으로 끌고 가지 아니하느냐 저희는 너희에게 대하여 일컫는 바 그 아름다운
이름을 훼방하지 아니하느냐 너희가 만일 경에 기록한 대로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 하신 최고한 법을 지키면 잘하는 것이거니와 만일 너희가
외모로 사람을 취하면 죄를 짓는 것이니 율법이 너희를 범죄자로 정하리라"
하였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마태복음 25장 45절에 "이에 임금이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 하시리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비유의 경고를 들으십시오. 이 비유는 바리새인들에게만 경고하는 말씀이
아닌 것입니다. 재물이 없다는 이유로 가난한 형제는 얍잡아 보거나 멸시하지
않습니까? 재물을 잃을 지언정 형제를 잃지 않기를 바랍니다. 얼마간의 재물이
아까워 형제의 고통을 외면하는 비윤리적인 신앙인이 되지 맙시다. 재물을
사랑하여 마땅히 사용되어야 할 곳에 사용하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는,
그러면서 가난한 자의 것을 빼앗고, 스스로 하나님의 자녀라고 생각하는, 여기
나오는 부자와 같은 사람이 되어서는 안되겠습니다.
우리의 주업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어찌 형제의
아픔을 보고서도 외면하면서도 하나님의 자녀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요한일서
3장 17,18절에 이런 사람들을 향한 권면의 말씀이 있습니다. "누가 이 세상
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 줄 마음을 막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할까 보냐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오직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
재물을 섬기는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맙시다. 그리고 재물을 사치하고 즐기는
데에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이웃들을 돌아보는데 사용합시다. 재물로
인하여 믿음을 잃어버리고, 마음이 둔하여진다면, 결국 영원한 불의 심판만이
우리를 기다리게 될 것입니다.